남도의 땡볕은 에누리 없이 푸른 들녘을 실하게 지지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농부가 막걸리 한 사발 새참에 콧노래 흥얼거리는 나주평야는 무심코 지나치면 "아따, 좋다" 그 자체다. 하지만 나주시청 앞마당 우유 통 널브러진 틈새에 떡 하니 버티고 선 천막은 예사롭지 않다. '생존권 보장' 붉은 머리띠를 두른 이들이 되는대로 퍼질러 앉아 "아따, 죽겄소" 타령이다. 벌써 보름을 훌쩍 넘어 천막을 지키는 낙농인들. 이들은 정부의 낙농정책 실패를 싸잡아 비난하고 있었다. 우유 수급조절에 실패한 정부가 내놓은 폐업과 감산 정책은 10년 약속이 3년도 못 가 무너진, 그래서 낙농인의 꿈이 무너진 '낙농인 도살책'이라는 게 주장의 요지다."비싼 사료 먹이고 고렇게 지극정성을 했는디"
지난달 30일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죽장리. 트랙터에 실린 2톤 탱크가 산길을 돌아 비탈 텃밭에 닿았다. 임춘빈(40)씨가 행여 결심에 흠 날새라 우악스럽게 탱크 손잡이를 돌리자 두 줄기 우유가 오줌발처럼 쏟아졌다.
새벽 댓바람에 한번, 해질녘 어스름에 한번 내외가 짠 신선한 우유 2톤은 우거진 잡초 먹이로 버려졌다. "한 방울이라도 더 나게 할라고 비싼 사료 먹이고 고렇게 지극정성을 했는디. 맴이 어찌겄소. 눈물 콧물 피땀을 버리는 것이재."
우유 버캐가 속절없이 밭을 메우는 사이 동석한 함평 낙우회 이영호(45) 회장은 휴대폰으로 속속 상황을 접수했다. "나산 쪽도 버렸다고, 그랴. 남은 물량은 쓰레기처리장에 버려야 쓰겄구만." 이날 함평 월야 낙농 90여 가구는 일삼아 산에, 들에 심지어 쓰레기장에 애써 짠 우유를 내다 버렸다.
함평뿐이 아니었다. 나주 보성 고흥 등 전남에 산재한 낙농가 대부분이 이날 집유(集乳)를 거부하고 우유를 버렸다. 이는 시청 군청 앞에 펼친 천막농성에도 꿈쩍하지 않는 정부를 향해 꺼내 든 낙농인들의 마지막 카드였다.
평소 같으면 "아따, 이녁 소 TV에 데뷰할 일 있는가. 외부사람 발 붙이면 소 빙 걸리고 스트레스 받아 우유 질 떨어져브러" 하고 출입을 막았을 축사도 "어차피 버릴 것잉게" 하는 푸념과 함께 열렸다.
함평 대동면 윤성치(62)씨는 어김없이 오후6시 젖소를 착유기로 몰았다. 외부인을 본 소들이 겁먹은 채 우왕좌왕 착유기 양쪽에 자리를 잡았다. 소 젖을 정성스레 소독하고 4개의 젖꼭지에 유두컵을 씌우자 우유가 냉각탱크로 옮겨졌다. "하루라도 안 짜믄 유방염에 걸려븐게, 허허."
그래서 일년 365일 하루도 쉴 틈 없이 소젖 짜는 낙농은 천직(賤職) 중의 천직이다. 젖소는 워낙 낯가리기가 심한 터라 부부가 함께 젖을 짜더라도 다루는 젖소가 따로 있을 정도다.
나주 봉황면 김재현(57)씨는 "저 푸른 초원 위에는 무슨 지랄 빤스여. 초상이 나 곡(哭)을 하다가도 시간 되믄 작업복 갈아입고 우유를 짜야 하는디. 남들 애경사도 못 챙겨서 사람 구실 못한다는 소리 듣기가 다반사"라고 했다. 이정심(50·여)씨가 씁쓸한 농으로 거들었다. "여편네 젖은 못 만져도 소젖은 기어이 만져브요 잉."
30년 넘게 손에 익힌 낙농 기술과 고단백질 완전식품의 생산자라는 자신감이 그나마 낙농을 천직(天職)으로 여기게 했다. 나주 왕곡면의 최재영(38)씨가 2대째 가업을 이은 것도 그 때문이다. "죄가 있다믄 비싼 조사료 먹이고 소 키우는 방법 지대로 터득해 우유 더 짜낸 것이재."
"불쌍한 소는 냅둬블고 우릴 도살해브쇼."
낙농인의 분노는 전라도 만의 문제는 아니다. 값싼 수입분유의 범람과 원유(原乳) 수급조절 실패에 따른 피해는 다른 지역 낙농가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전라도의 분노가 특히 거센 데는 이유가 있다.
발단은 1999년 정부가 원유 수급조절과 시장개방에 대비하기 위해 낙농가와 유가공업체를 하나로 묶는 '집유일원화' 사업을 펼치고 낙농진흥회(낙진회)를 꾸리면서부터. 그 동안 개별 계약으로 정확한 데이터가 나올 리 없었고 이는 수시로 낙농 위기를 불러왔다.
유가공업체 하나 끼고 있지 않아 께름칙했던 낙농인들은 10년 생산보장과 '규모의 농업' 지원 강화를 철석같이 믿고 낙진회에 가입했다. 특히 전라도와 제주도는 시범지역으로 선정돼 가입률이 가장 높았다.
전국 70%에 육박했던 낙진회 가입은 우유 대기업인 서울우유가 탈퇴하면서 34%대로 떨어지고 원유 수급조절도 물 건너 갔다. 하지만 낙농가의 97%가 낙진회에 가입했던 전남은 지역 유가공업체 7개가 모두 망해 돌아갈 곳도 없었다. 함평의 정모(47)씨는 "약속은 무슨 개뿔…, 가입 시킬라고 집집마다 돌아 댕김서 난리 부루스 탱고 지루박을 치드만. 3년도 못 가브러!"라고 혀를 찼다.
지난해부터 낙진회가 소속 농가를 상대로 실시한 원유 차등 가격제와 젖소 도태 등이 농민들의 분노를 키웠다. 그리고 올해 내놓은 폐업 보상과 1일 잉여량 810톤 중 410톤 감산 등 낙농발전종합대책이 기어이 낙농인들의 속을 발칵 뒤집었다.
나주 다시면 이창호(42)씨는 "시설 투자하라고 꼬셔 갖고 빚만 2∼3억 맨들고 인자 뽀개라믄 우리더러 죽으란 말이재" 라고 언성을 높였다.
더구나 현재 납유량에서 37.5%가량 줄이는 감산 대상에서 비낙진회 낙농가는 제외돼 "낙진회 농가만 손해 본다"는 상대적 박탈감까지 더했다. "막말로 봉급을 40%나 줄인디 살 수 있겄소. 원유를 줄일라믄 전체 낙농가를 상대로 해야재." 오히려 오정자(49·여)씨는 "요상시러, 일반 농가는 우유업체서 생산량을 늘리라고 한다드만"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앗따, 이참에 도청이고 청와대고 우유 갖다가 찌끄러블잖게." "아재! 글믄 괜히 욕만 안 먹겄소." "딴 지역이랑 보조를 맞춰야 한게, 좀 보드라고." 허공에 주먹한번 휘두른 적 없던 주민들이 대책을 논의하느라 떠들썩하던 나주 시청 앞이 젖 짤 시간이 다가오자 썰렁하다. "이리 소에 매있이니 투쟁도 못 하재라."
농림부 장관에게 탄원서까지 썼다는 윤성치씨가 굵직한 책자를 꺼내며 내뱉듯이 말을 던졌다. "미국 1인당 우유 소비량이 262㎏, 일본이 90㎏. 우리는 아즉 59㎏인 게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단게. 폐업하는데 돈 쓰지 말고 소비 늘릴 궁리를 해야 쓴디… 그라고 우유 좀 많이 드쇼 잉."
유가공품은 수입乳 사용… 과잉 공급 90만톤 달해
전국에는 1만2,000여 가구가 54만 여 마리의 젖소를 키우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으로 외국산 분유가 밀려들면서 공급과잉 '우유대란'은 시작됐다. 낙농기술의 비약적인 발전도 한몫 거들었다.
원유 수급조절이 어려웠던 정부는 99년 낙농진흥회(낙진회)를 만들어 집유일원화를 꾀했다. 하지만 우유가공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시범지역으로 선정된 전라 제주를 제외하곤 별다른 호응이 없었다. 결국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지 못한 낙진회는 원유 수급조절 능력을 상실했다. 낙진회의 딜레마는 현재 남은 34%의 회원 농가만을 상대로 늘어나는 국내 원유 생산량을 줄이는데 있다. 비낙진회 농가는 개별 업체의 수급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감산은 고스란히 낙진회 회원의 몫이다. 낙진회는 지난해 4월 젖소 3만두 도태, 초과물량은 원가(1㎏당 450원)에도 못 미치는 1㎏당 200원에 쳐주는 잉여원유 차등가격제를 실시했다. 설상가상 올해는 폐업과 강제 감산을 실시할 예정이다.
지난 해 국내 우유 생산량은 250만 톤, 수입량은 65만 톤이었다. 전체 유제품 소비량(300만 톤)과 단순 비교하면 재고 우유는 15만 톤에 불과하다. 하지만 실제 낙농가가 떠안는 과잉공급 물량은 90만 톤에 이른다. 이는 국내 유가공 업체들이 음용유(160만 톤) 이외의 유가공품(140만 톤) 원료로 값싼 재고유나 수입유를 쓰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우유수급의 난맥상 역시, 한국 농업 고질의 단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