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인사이드/ 빈 라덴 사살 이후 '파키스탄 정보부 이중간첩' 논란

입력
2011.05.13 12:41

■ '보이지 않는 정부' ISI, 알 카에다와 거래 있었나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이후 고조되고 있는 미국과 파키스탄간 갈등의 핵심엔 파키스탄정보부(ISIㆍInter-Services Intelligence)가 있다. ISI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와 유착해 빈 라덴 등 테러리스트를 비호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미국이 빈 라덴 은신처 등에 연루된 파키스탄 정부 내 관련 인사들의 신원 공개를 요구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간접적으로 ISI에 대한 강한 의혹을 제기하는 상황이어서 ISI의 '이중성'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ISI, 알 카에다와의 유착 정황 짙어

ISI가 탈레반과 알 카에다에 깊숙이 연계돼 있다는 물증은 없다. 파키스탄은 9ㆍ11 테러 이후 미국 제1의 대테러 동맹국이고, ISI는 이를 현장에서 수행하는 정보기관이다. 그럼에도 ISI의 이중간첩 논란이 나오는 것은 의심을 살 만한 정황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9ㆍ11 테러 이후 체포되거나 사살된 수십명의 알 카에다 고위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파키스탄에 은신해 있었다.

알 카에다 작전사령관인 아부 주바이다가 2002년 펀자브주에서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아프간 알 카에다 최고책임자인 무스타파 알 야지드, 셰이크 사이드 마스리, 아부 라이트 알 리비 등이 아프간 접경인 북와지리스탄에서 붙잡히거나 미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빈 라덴 은신처 확인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알 카에다 서열 3위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도 2003년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붙잡혔다. 올해 2월에는 탈레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가 카라치에서 검거됐다.

파키스탄 전역에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갖고 있는 ISI가 한두 명도 아닌 이들의 암약을 몰랐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파키스탄 정부도 ISI 내부의 '불량요원'이나 은퇴한 관리가 문제일 가능성을 인정하고 자체 조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탈레반 정권 태생부터 깊이 관여

ISI와 탈레반의 유착은 뿌리가 깊다. ISI는 1979년 구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했을 때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의 무장과 군사훈련을 지원하는 등 반 소련 항쟁에 적극 가담했다. 90년대에는 파키스탄 내 난민캠프에서 탈레반의 훈련과 자금지원을 맡아 96년 탈레반 정권 창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탈레반과의 촘촘한 인적 네트워크는 이 때 형성됐다. 파키스탄이 탈레반 정권을 외교적으로 승인한 단 세 나라 중 하나였다는 것은 당연하다.

영국 선데이 타임스는 아프간 보안 관리들의 증언을 토대로 "탈레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퀘타 슈라' 구성원 15명 중 7명은 ISI가 파견한 인물"이라고 최근 보도했다. 교량, 도로 등 아프간 주요 기간시설에 대한 파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의 보급선 차단, 친미 아프간 정부 인사 암살 등의 탈레반 전략도 ISI의 작품이라는 말이 나온다. ISI가 탈레반에 정성을 쏟는 것은 숙적인 인도를 의식해서다. 아프간이 인도를 견제할 전략적 요충지인데다 카슈미르 등 국경분쟁에 이슬람 세력의 지원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ISI는 아프간 주둔 미군에 테러를 감행하는 무장단체 하카니와 대(對) 인도 게릴라전에 나선 라쉬카르 에 타이바(LeT) 등 자생적 테러단체를 공공연히 비호하고 있다.

정부통제 벗어난 무소불위 권력 휘둘러

ISI는 태생적으로 인도와 악연을 갖고 있다. 1947년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인도와 1차 전쟁이 일어나자 카슈미르와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에서 첩보전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80년대에는 반정부세력 제거를 위한 정보수집과 정치공작으로 영역을 넓히며 대통령도 어쩌지 못하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 됐다. 2007년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 암살과 2008년 인도 뭄바이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부토 전 총리의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은 2009년 취임 초 ISI 개혁을 들고나왔다가 24시간도 안돼 철회하는 수모를 겪었다. 자르다리 대통령은 ISI를 민간정부 통제하에 두려 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아슈파크 파르베즈 카야니 합참의장과의 파워게임에 밀렸다. 현 아흐마드 슈자 파샤 ISI 부장은 카야니 의장의 오른팔이다. 100여기에 달하는 핵무기와 핵물질도 ISI와 군부가 통제하고 있다.

파키스탄 국민은 이런 ISI를 '국가 내 국가' '보이지 않는 정부'로 부른다. 일부 아프간인들에게는 '탈레반의 대부'로서 신뢰의 대상이다. 국방부 산하로 중장급이 책임자이지만 군 수뇌부는 물론 대통령에게도 보고하지 않을 만큼 정부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조직은 정치사찰, 대테러, 요인경호 등을 맡는 합동정보국, 탈레반과 카슈미르를 책임지는 북부합동정보국, 해외 비밀공작이 임무인 일반합동정보국 등 7국(局)체제이며 본부는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다.

워싱턴=황유석특파원 aquarius@hk.co.kr

■ 美와 파키스탄의 '애증의 역사'

미국 입장에서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딜레마 그 자체다.

파키스탄은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수행에 있어 보급로, 교두보 역할을 하는 핵심 파트너다. 게다가 인구 1억7,000만명에 100여기의 핵무기까지 보유했다. 미국이 동맹관계를 잘 유지하면 금상첨화일 만큼 전략적 가치가 큰 나라다.

그러나 오사마 빈 라덴 사살 과정에서 드러났듯 양국 관계엔 불신의 벽이 높다. 미국 내에서는 '과연 무슬림 국가 파키스탄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파트너로 적합한가'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반대로 파키스탄에선 반미 감정이 거세다. 미국 외교가 풀어야 할 숙제다.

1일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빈 라덴이 사살된 이후 미국과 파키스탄의 갈등은 고조됐었다. 하지만 13일 현재 진정 국면에 접어드는 분위기다. 이런 타협과 애증의 역사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반복됐다.

1947년 파키스탄이 영국에서 독립한 뒤 미국과의 관계는 괜찮았다. 미국은 소련 견제를 위해, 파키스탄은 앙숙 인도를 누르기 위해 제휴했다. 50년대엔 미국이 파키스탄 군사 지원 명목으로 20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고, 파키스탄은 소련군 정찰용 미군기 이ㆍ착륙 허용으로 화답했다.

70년대부턴 파키스탄의 핵개발 시도가 양국의 불화 요소였다. 하지만 1979년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미군의 아프간 침공 등 두 차례의 전쟁이 관계 회복의 계기가 됐다. 파키스탄이 모두 미군 편에 섰기 때문이다. 미국은 2002년 이후 파키스판에 54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고, 내년에도 15억 달러를 지원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중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들인 정성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삐걱대기 일쑤였다. 최근에도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 파키스탄 주재 외교관의 현지인 권총 사살 사건, 미군 무인폭격기 오폭 논란 등으로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빈 라덴 사살 이후 그의 도피를 파키스탄 정보부(ISI)가 비호해왔을 것이란 논란은 양국 관계에 결정타가 됐다.

미국의 딜레마는 해결 난망이다. 파키스탄의 역할이 필요하고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지원을 끊어 핵보유국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도 없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갈등의 폭발성을 방치하기는 어렵다. 피트 호크스트라 전 미 하원 정보위원장은 "이번에 파키스탄은 우리에게 빚을 졌다. 그렇다고 파키스탄과 척을 질 경우 대안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하지만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오바마 대통령은 파키스탄이 미국에 해를 줄 수 있는 나라라는 불편한 현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양국관계의 근본적 재검토 필요성에 대한 지적이었다.

정상원 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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