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계에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통설이 있다. 그러나 최근 이를 깬 스타 출신 지도자가 있다. 1980년대 한국 여자농구의 국보급 센터로 활약했던 박찬숙 감독이다. 그는 지난해 3월 창단한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서대문구청)’을 이끌고 올해 4월과 6월 2024 전국실업농구연맹전, 8월 제79회 전국남녀종별농구선수권대회, 10월 제105회 전국체육대회까지 ‘4개 대회 12경기 연속 무패 우승’을 달성했다. 선수와 지도자로 모두 정점을 찍은 박찬숙 감독을 지난달 5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서 만났다.
“다음 목표요? 36연승입니다.”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박 감독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그는 “현역 시절 여자농구 최장 연승 기록(35연승)을 세웠는데, 이 기록이 아직도 안 깨지고 있다”며 “내가 감독으로 이를 깨겠다”고 강조했다. 선수로서도, 지도자로서도 늘 최고의 자리를 목표로 하는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다짐이다.
타고난 악바리 근성이다. 그는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장신은 발이 느리다는 편견이 너무 싫었다”며 “그래서 발이 빠른 친구들과 연습을 했고, 그 친구들에게도 (스피드 면에서) 절대 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슈팅 연습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던 덕분에 그는 센터임에도 빠른 발과 정확한 슛으로 코트를 점령할 수 있었다. 박 감독은 또 “리바운드뿐 아니라 피딩도 했던 선수”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뛰어난 신체조건(190㎝)에 노력까지 더해지자 그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숭의여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5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고, 졸업 후에는 실업농구팀 태평양화학 소속으로 △대통령기 남녀농구대회 5연패 △전국종별선수권대회 4연패 △전국종합선수권대회(농구대잔치 전신) 3회 우승 등의 금자탑을 쌓았다.
백미는 1984년 LA 올림픽 은메달이었다. 당시 여자농구대표팀 주장이었던 그는 캐나다·유고·호주·중국을 연파하고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구기종목 올림픽 은메달을 이끌었다. 박 감독은 “올림픽을 마친 후 김포공항부터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쳤는데, 온 국민이 꽃가루를 뿌려줬다.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이었다”며 흐뭇해했다.
선수로 정점을 찍은 그는 1985년 돌연 은퇴 후 결혼을 하고 1986년 딸을 출산했다. 박 감독은 “내 원래 꿈은 현모양처였다”며 웃은 뒤 “남편 출근시키고 청소하고 기저귀 빠는 일상이 무척 재미있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그러나 전업주부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1988년 대만 농구팀 난야플라스틱 소속으로 코트에 복귀하며 한국 농구 최초의 ‘주부 선수’가 됐다. 박 감독은 “출산과 공백이 있었는데도 혼자 몸을 만들어 대만에 갔다”며 “그럼에도 당시 최고 기록인 51점을 넣은 경기도 있었다. 3점슛이 없던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기록”이라고 밝혔다.
그의 도전은 끝이 없었다. 1992년 친정팀의 플레잉코치로 국내 무대로 돌아왔다. 박 감독은 “대만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태평양화학에서 ‘1년만 플레잉코치로 뛰면서 선수들 사기를 높여달라’는 제안이 왔다”고 설명했다. 결국 1994년에서야 완전히 유니폼을 벗은 그는 이후 농구 해설위원, 여성 최초 농구 국가대표 감독, 대한체육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지도자로서도 꽃길만 걸을 것 같았던 박 감독이지만, 그에게도 넘지 못한 벽이 있다. 2007년 6월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할 진정서를 들고 취재진 앞에 섰다. 여자프로농구(WKBL) 모 구단의 감독 공모 과정에서 성차별로 탈락했다는 것이 진정서 내용의 골자였다. 그는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다”며 “철저한 계획과 비전을 가지고 면접에 응했는데, 결국에는 남성 후보들이 학연·지연을 통해 채용되더라”라고 토로했다. 비록 그는 끝내 프로팀 지휘봉을 잡진 못했지만, 이후 인권위는 ‘스포츠 구단에 1명 이상의 여성 지도자를 둘 것’을 권고했다. 이옥자(구리 KDB생명) 유영주 박정은(이상 부산 BNK썸) 등이 프로팀 감독으로 선임되는 데 물꼬를 튼 셈이다.
코트 밖에서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박 감독은 “1998년 이모가 ‘친구가 발효식품 사업을 하는데 얼굴 마담을 해달라’고 부탁해서 수락했는데, 결국 그 회사는 부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12억 원이 넘는 빚을 떠안았다”며 “사업의 ‘사’ 자도 모르는 상태라 은행에서 오는 서류를 그냥 찢어버렸더니 결국 법정 다툼까지 가는 상황이 됐다”고 털어놨다. 이어 “어느 날 너무 무섭고 힘들어서 숨을 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다섯 번 정도 머리를 떨군 뒤 ‘애들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덧붙였다. 이 일로 파산신청까지 하게 된 그는 설상가상 2009년엔 남편을 직장암으로 먼저 떠나보냈다.
흔들리던 박 감독을 다잡아준 건 역시 농구였다. 그는 2018년부터 WKBL 경기운영본부장∙육성본부장 등 농구 행정가로 활동했고 지난해엔 사령탑으로 코트에도 복귀했다. 이 과정에는 이성헌 서대문구청장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박 감독은 “기초지방자치단체에서 개인종목이 아닌 단체종목팀을 창단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이 구청장님이 과감하게 이를 결단했다”고 전했다.
박 감독에게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낸 것도 이 구청장이다. 박 감독은 “구청장님이 2022년 12월에 지인을 통해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며 “내가 ‘정말로 단체종목팀을 만드실 생각이냐’고 물으니 ‘감독님이 맡아주면 창단하겠다’고 답하더라. 그래서 두말하지 않고 제안을 수락했다”고 설명했다.
화려한 창단식을 열고 실업농구팀으로서의 여정을 시작했지만, 첫해에는 선수단을 완벽하게 꾸릴 시간이 촉박했다. 이 때문에 스카우트가 아닌 공모로 9명의 선수를 모집했다. 박 감독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게임 한 게임을 치르면서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더라”며 “또 승부의 세계는 어쨌거나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한눈팔지 않고 팀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고 강조했다. 그가 기존 거주지였던 서초구 서초동에서 팀 숙소와 가까운 서대문구 홍제동으로 이사를 온 것 역시 “적당히가 아닌, 화끈하게 해보자”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년의 적응기를 마친 박 감독은 대대적인 선수단 보강에 들어갔다. 2013~14시즌부터 2023~24시즌까지 WKBL에서 활약했던 김한비를 비롯해 윤나리 유현이 박은서 이소정 등이 합류했다. 박 감독은 “우리 팀에는 프로에서 조기 은퇴했거나 정착하지 못한 친구들, 고교∙대학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못 받은 선수들 등 사연이 있는 이들이 모여있다”며 “그럼에도 이들이 각자의 역할을 확실히 수행하며 좋은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승 4관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한 비결을 묻자 박 감독은 “일단 선수들의 구성이 확실하다. 탄탄한 수비 또한 강점”이라며 “특히 주장 윤나리가 선수단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경기 외적으로도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려 노력하고 있다”며 “예를 들어 60평대 아파트 3채를 숙소로 마련해 선수들이 편하게 생활하게 했다. 이 구청장님도 선수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마음껏 먹게 해준다”고 웃음 지었다.
박 감독과 선수단은 올해 10월 25일 서대문구를 돌며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박 감독 개인으로서는 LA 올림픽 이후 꼭 40년 만의 카퍼레이드였다. 그는 “그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구민들이 나를 알아봐주고, 같이 얘기하고, 사진을 찍는 걸 보면서 흐뭇했다. 또 구민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해줬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며 “선수들도 ‘감독님 저희 너무 좋아요’라며 기뻐하더라. 그 자체로 행복했다”고 밝혔다.
박 감독의 시선은 현 리그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여자 농구계 전체의 발전을 바라보고 있다. 박 감독은 “우리 팀 선수들이 기량을 인정받아 프로로 스카우트되면 당연히 보내줄 것”이라며 “프로에도 아시아쿼터제 도입으로 입지가 줄어든 (토종) 선수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실업팀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실업팀에서 잘한 선수들은 프로로 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