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은 경제 성장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의 무역은 과연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우리나라 삼한시대(삼국시대 이전 마한·진한·변한)에 대한 기록은 너무 적어서 중국 역사책에서 언급된 기록을 포함한다 해도 귀하다. 그래서 이 시대 유적은 역사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더 귀하고 의미심장한 자료이기도 하다.
해남군곡리패총(전남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 언뜻 선사시대 생활 유적을 연상시키는 이름이지만, 사실 격동적인 고대사의 현장이다.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로 정립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극히 드문 유적이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은 해남 바닷가에 자리 잡은 이 유적이 ‘삼한시대 국제 무역항’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아울러 마한(한반도 중서부 연맹체)의 마지막 세력이었던 신미국(新彌國)이 이 지역에 자리 잡고 백제에 끝까지 저항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여러 차례의 발굴에서 우리 고대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출토됐고, 최근 국가유산청의 9차 발굴 조사에서는 ‘배 모양 토기’가 발견됐는데, 이곳이 국제항이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로 해석돼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이곳 해남이 단순히 ‘땅끝’이 아니라, 또 다른 땅을 연결하는 바다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고대사 유적이다.
해남군곡리패총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다. 목포에서 오는 길은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 풍경에 남도의 정취가 한껏 느껴진다. 반면, 강진에서 내려오는 길은 미황사를 품은 달마산을 거치는데, 산세가 별천지다. 이후 만나는 방처마을의 남쪽, 해발 334m 가공산의 서쪽 자락에 해당하는 둥그스름한 구릉성 산지가 바로 유적이다.
조개 부스러기가 하얗게 흩어져 있는 입구를 지나 능선의 등성이로 올라서면 평평한 농경지 너머로 아련히 백포만의 바다가 보인다. 경지 정리 전에는 바닷물이 유적 부근까지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쥐 죽은 듯 조용하지만, 당시에는 시끌벅적한 파시(波市)가 서는 항구도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곳에 고대 도시가 형성됐던 것일까?
40여 년 전 이곳은 마늘밭으로 뒤덮인 구릉이었다. 눈썰미가 남달랐던 향토 사학자 황도훈씨가 1983년 조개껍데기와 불 자국이 있는 토기편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을 보고는 ‘아, 여기도 창원 성산패총 유적(경남 창원시 성산구)과 똑같은 유적 아닐까?’라며 언론에 알렸다. 이후 목포대학교의 최성락 교수가 현장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발견된 조개껍데기들은 당시 사람들의 바다 먹거리와 바닷가 생활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하지만 이 조개껍데기들은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땅속에 묻힌 더 의미심장한 유물과 유적, 즉 고대 타임캡슐을 꺼낼 수 있도록 땅 위에 삐죽 튀어나온 뚜껑 손잡이 역할을 한 것이었다.
1986년에 최초 발굴이 시작돼 올해까지 9차례 진행됐고, 2003년엔 국가사적(제449호)으로 지정됐다. 처음엔 패총(貝塚), 즉 고대인들이 조개를 먹고 버린 ‘쓰레기장 유적’ 정도로 생각됐지만, 그 속에 감춰진 유적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기원전 4~3세기 초기 철기시대에서 5세기경 백제시대에 걸치는 사회문화변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고대사 교과서 같은 유적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평평한 능선 정상부근에서 대형 주거지와 고인돌,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의례가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물(말뼈 등)이 발견됐다. 특히 촘촘하게 중복 배치된 주거지와 특별한 장례법을 보여주는 돌무덤은 상당히 의미 있는 유적이다. 또 청동거울 파편, 시기가 늦은 층에서 출토된 복골(卜骨·점을 치는 데 쓰던 뼈 도구), 그리고 제작할 때 고도의 불 기술이 필요한 유리 구슬과 쇳물 슬러지 등도 발굴됐다.
마을의 핵심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방어용 환호(環濠)도 드러났고, 토기를 굽는 가마도 발굴됐다. 여기에 쓰레기장(패총)이 별도로 조성됐으니, 그야말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도시가 성장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올해 9차 발굴에서는 부뚜막 모양 토기와 배 모양의 토기가 함께 출토돼 고고학자들을 들뜨게 했다.
통일신라시대 왜승 엔닌(圓仁·794~864)이 일본으로 갈 때 흑산도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고, 또 장보고의 도움으로 장도에서 신라 배로 갈아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여정은 700~ 800년 전에도 비슷했을 것이다. 실제로 군곡리유적에서 중국 고대 왕망이 세운 신나라(新·8~23년) 화폐인 화천(貨泉·돈이 샘솟는다는 뜻)이 발견됐다. 이 화천은 고대 평양 부근의 낙랑 유적을 비롯해 김해회현리패총(봉황동 유적), 제주도 신지항, 그리고 멀리 일본 규슈 지역 바닷가 유적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연안 해로를 이용한 서남 해안 지역 교역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미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교역로가 한반도의 서남 해안을 따라서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각 지역 유적에서 발견되는 중국계·왜(倭)계 유물들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군곡리패총 앞 백포만은 서해에서 남해안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또 조석 간만의 차가 매우 큰 진도 명량해협을 지나기 위해서는 물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 꼭 경유해야 하는 항구가 바로 군곡리였다고 보는 것이다. 어쩌면 ‘군곡리 항’은 신라시대 서해를 제패했던 청해진의 전신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군곡리는 장보고의 장도 청해진이 위치해 있었던 완도와 바로 이웃해 있다.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약 300년 동안은 아마도 한국동란을 제외한다면 한반도 역사상 가장 격동의 시간일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초 고조선이 망하고 위만조선이 한반도 서북 지역에 들어섰다. 이후 100년이 채 되지 않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 서북지역 주민들이 대거 남쪽으로 이동하게 됐다. 이런 충격 속에서 마진변(馬辰弁) 삼한 지역에 철기 등 북쪽의 새로운 문화가 전해지고 새로운 정치집단이 등장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라, 가야, 백제 등 고대국가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군곡리 유적이 시작된 시점이 이 격동의 시간과 겹친다는 점은 군곡리 사람들의 출현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부여 송국리 유적(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에서 출토된 요녕식 동검(비파형 동검)에서 보듯이 일찍이 오늘날 충남지역으로 이주한 고조선의 준왕 세력이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을 더욱 남쪽으로 밀어냈고, 훗날 무너진 위만조선의 이주민들도 바다를 통해 해남 강진 일대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언급된다. 결국 신미(新彌)국은 해남 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북방 이주민이 지역민과 함께 세운 나라인 것이다. 중국 진서(晉書) 사신 기록에서도 보이듯 신미국은 목지국이 백제에 의해 해체된 이후 4세기 중엽까지 가장 강력한 마한의 맹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신미국의 거점이자 무역항이 바로 군곡리이었을 것이다.
침미다례(忱彌多禮). 일본서기에 '도륙하여 백제에 주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침미’와 ‘신미’는 같은 음을 가지고 있고 ‘다래’는 ‘다라’의 다른 표기로 나라를 의미하니 바로 ‘신미국’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일본서기는 역사적인 사실을 마치 왜가 주도한 것처럼 윤색하는 것이 다반사지만, 지명이나 인명의 경우는 그 글자 표현이 어떻든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의 기사로 미루어 보면, 백제와 왜가 연합 공격을 할 만큼 신미국의 세력은 컸고, 끝까지 백제에 복속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미국의 멸망은 결국 △백제가 호남 지역의 마한 세력을 완전히 병탄(竝呑)했고 △군곡리 시대도 끝이 났음을 의미한다. 한반도 고대 역사의 한 장이 끝나고 새로운 장이 시작된 사건이다.
무화과가 무르익은 지난여름 이곳을 찾았을 때, 반달 능선 정상부에 키가 큰 풀들 위로 나무 한 그루가 삐죽하니 나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 군곡리 옛사람들도 멀리 개펄 끝에 서서 돛을 달고 들어오는 배를 망부석같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