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기계가 아니다. 경찰은 로보캅이 아니다."
'제79주년 경찰의 날'인 21일. 경찰의 생일이라 할 수 있는 날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앞에서 20여 명의 경찰관들이 '단체 삭발식'을 감행했다. 이들은 경찰 수뇌부가 현장경찰을 믿지 못해 순찰차 위치정보시스템(GPS)으로 감시하고, '밀어내기식' 순찰을 강요한다며 조지호 청장을 규탄했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동안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라는 울분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취임 3개월 차를 맞은 조 청장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압수물 횡령 등 조직 내 각종 비위행위가 잇따라 터지면서 경찰의 기강 해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현장경찰 등 하위직을 중심으로 '기강 잡기'에 나선 조 청장에 대한 불만이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다.
경찰의 노동조합격인 전국경찰직장협의회(직협)는 21일 오후 경찰청 앞에서 '현장경찰관 인권탄압 규탄대회'를 열었다. 집회에는 민관기 직협 위원장 등 경찰 2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조 청장에게 하위직 경찰의 목소리를 경청하라며 △근무여건 개선을 위한 계획 수립 △안전근무 환경 조성 △신뢰회복 위한 불합리한 감시체계 중단 △조직개편의 절차적 정당성 확보 등을 촉구했다.
민 위원장과 퇴직 경찰관 등 9명은 삭발도 마다하지 않았다. 직협은 "현장 경찰관은 생일날(경찰의 날), 좌절과 비통한 마음에 머리를 깎는다"며 "처벌 목적의 이중 감시 체계가 경찰관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해 자존감과 사기를 떨어뜨려 치안 서비스의 질이 하락하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 지휘부와 현장경찰 간 갈등이 본격화한 건 지난 2일이었다. 27년 차인 경남 김해중부경찰서 신어지구대 소속 김건표 경감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조 청장에 대한 국회 국민동의 탄핵청원을 올린 게 계기가 됐다. 청원은 2주가 채 안 돼 5만 명의 동의를 얻었다. 지난 8월 경남 하동에서 가출 신고된 40대 여성이 순찰차 뒷좌석에서 숨진 지 36시간 만에 발견된 이후, 경찰청이 근무감독을 강화하면서 쌓였던 고질적인 인력난과 업무과중으로 인한 불만이 폭발했다는 분석이다.
경찰 수뇌부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 강남서와 용산서에서 연이어 현직 경찰의 압수물 횡령이 적발됐고, 영등포서의 한 과장은 부하 직원에 대한 성희롱으로 대기발령 조치됐다.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바닥을 친 가운데 내부 단속을 마냥 강화하기도 쉽지 않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이 낸 처우 개선 메시지 역시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서라는 관측이다. 경찰의날 기념식에 참석한 윤 대통령은 "경찰의 막중한 사명과 헌신에 걸맞게 앞으로 정부는 더욱 적극 지원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다만,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렸던 지난해 행사와 달리 김건희 여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현장 반응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경찰관 범죄는 개인 일탈로 치부할 게 아니라 조직 차원의 진단을 통한 해결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면서 "조직개편 또한 내부반발이 크다면 자발적 동의를 기초로 한 방법도 고민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