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 판매대행을 하는 중견 업체 경영진이 세무공무원을 매수하고, 법원에 허위자료를 제출하는 등의 수법을 써서 10년간 200억 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나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중앙지검 조세범죄조사부(부장 이진용)는 9일 의약품 판매대행업체 P사 대표 최모(63)씨 등 경영진과 공인회계사, 가공거래업체 대표, 전·현직 세무공무원 등 20명을 기소했다. P사는 의약품 판매대행업을 하는 중견기업으로, 과거 세계적인 화장품 개발·생산(ODM) 전문 기업 H사의 계열사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 따르면 P사 대표 최씨와 상무 김모씨는 2014년 창립 직후부터 올해 3월까지 일부 거래 업체들과 거래를 가장해 회삿돈을 유출한 후 수수료를 제외한 현금을 반환받는, 이른바 '페이백' 수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 파악된 비자금 규모는 약 255억 원으로, 이들은 허위세금계산서를 통해 5년간 법인세 약 30억 원을 포탈하기도 했다. 수사팀은 5월 대표 최씨와 상무 김모씨를 먼저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P사의 비자금 흐름을 쫓는 과정에서 세무공무원 5명에 대한 사측 로비 정황도 포착했다. 세무조사를 무마하거나 원만히 종결해 달라는 명목 등으로 거액의 현금이 오간 것으로 조사됐다. 현직 지방국세청 팀장 조모씨는 2022년 P사로부터 8,000만 원을 수수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로, 전직 세무공무원 김모씨는 세무조사 관련 알선 명목으로 5,400만 원을 받아챙긴 혐의(특가법상 알선수재)로 구속 기소됐다.
최씨 등의 범행이 장기간 드러나지 않았던 건 이들을 치밀하게 도운 공인회계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P사 세무대리를 맡은 공인회계사는 처방전 실적 통계표 등 증거자료를 조작하다가, 한 코스닥 상장사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아예 P사의 가공거래 상대방 역할을 했다. 세무 조사과정에서 P사의 가공거래가 단 한 차례도 발각되지 않았다고 한다.
간이 커진 일당은 사법부도 속였다. P사의 가공거래 상대 업체가 고발당하자, 세무조사가 P사로 확대되는 걸 막기 위해 검찰과 법원에 조작된 증거를 제출하거나 경영진이 직접 재판에 출석해 위증까지 했다. 두 건의 형사재판 재판부는 일당이 증거로 제출한 수수료 자료, 처방전 발급기록 등은 임의 조작·발급할 수 없는 자료라고 판단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10년간 법망을 피한 이들도 끝내 덜미를 잡혔다. 검찰은 "P사와 거래한 업체 한 곳에서 첩보를 입수한 뒤, 수차례 압수수색을 통해 P사의 거래 자료를 전수 조사해 범행을 밝혀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