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가 20년 만에 새 행정부 수반을 맞았다. 장기 집권해 온 리셴룽(72) 총리가 로런스 웡(52) 부총리에게 총리직을 넘기면서다. 이로써 그의 부친이자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리콴유 초대 총리부터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온 ‘리콴유 가문’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됐다. 미국과 중국 갈등이 날로 격화하는 상황에서 균형 외교를 통해 실리를 찾는 것이 새 총리의 과제가 될 전망이다.
14일 싱가포르 스트레이트타임스에 따르면 로런스 웡 부총리는 이날 오후 취임 선서를 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취임식에서 "역경을 이겨내고 '싱가포르의 기적'을 유지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며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항상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다짐했다.
웡 신임 총리는 싱가포르가 1965년 말레이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후 네 번째 총리다. 지난 20년간 싱가포르를 이끌어온 전임 리 총리는 새 내각 선임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웡 총리는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시간대와 하버드대에서 경제학·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 귀국 후 정부 산하 경제 연구기관에서 경력을 쌓았고 능력을 인정받아 이후 재무장관 등 6개 부처 고위직을 지냈다.
웡 총리 취임은 싱가포르 정치권력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리콴유 초대 총리는 1959년 6월부터 1990년 11월까지 31년간 장기 집권했다. 리콴유·리셴룽 부자가 총리 자리에 있던 기간만 51년에 달한다. 사실상 한 가문이 싱가포르 현대사 전체를 통치했다.
2대 총리였던 고촉통 총리(1990~2004년 재임) 역시 싱가포르 엘리트 정치 가문 출신이다. 이에 반해 웡 총리는 싱가포르 공립학교 출신으로 아버지는 영업사원, 어머니는 교사였다. 중산층 출신 첫 싱가포르 총리인 셈이다. 당초 리셴룽 총리의 37세 아들이 권좌를 이어받을 것이라는 ‘3대 세습설’도 돌았지만, 차기 총리는 비(非)리콴유 가문 출신으로 정해졌다.
싱가포르는 독립 이후 줄곧 현 여당인 인민행동당(PAP)이 집권하고 있다. 실질적 정부 수반인 총리는 형식적으론 상징적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실제론 당 지도부가 ‘후계 그룹’을 구성한 뒤 한 명을 선발하는 과정을 거친다. 정해진 임기도 없다.
웡 총리는 2018년 PAP의 후계 그룹에 포함될 당시만 해도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당시 정부 합동 태스크포스 공동의장을 맡아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부상했다. 2022년 후계자로 최종 낙점된 후에는 부총리를 겸직하며 ‘대권 수업’을 받아왔다.
새 총리는 리 총리의 노선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싱가포르 경제를 성장시키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등 외교·내정 양면에서 전임자와 다른 과제를 마주하게 됐다.
안으로는 둔화된 경제 성장이 발목을 잡고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약 9만2,000달러(약 1억2,700만 원)에 달하는 싱가포르는 ‘강소국’의 대표주자다. 그러나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와 성장세 둔화, 사회보장 비용 증가 등으로 예전과 같은 호황을 이어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사실상의 일당독재, 권위주의 통치 등에 거부감을 느끼며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는 여론도 적지 않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갈등 국면에서 균형을 잡는 게 과제다. 웡 총리를 비롯해 싱가포르 국민의 약 75%는 중국계다. 중국은 싱가포르의 최대 무역파트너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친미 국가로 꼽히는 등 외교 측면에서는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웡 총리는 이날 취임식에서도 "작은 나라인 싱가포르는 강한 역류에서 벗어날 수 없고, 더 복잡하고 위험한 세계에 적응해야 한다"며 "가까운 곳(중국)과 먼 곳(미국)에서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싱가포르의 이익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