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페어'는 예술 작품을 판매하는 장터다. 잠재 고객들에게 소속 작가를 알리고 작품을 판매하기 위해 갤러리들은 수백만~수천만 원에 이르는 부스 비용을 내고 페어에 참여한다. 9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개막한 '아트부산 2024'에선 한 갤러리가 빌린 부스를 일부러 걸어 잠갔다. 왜일까.
"아트페어 기간 중 갤러리신라 부스는 닫혀 있습니다." 하얀 벽에 덩그러니 영문과 국문으로 이 같은 문장을 써 뒀다. 28㎡(약 8.47평) 남짓 부스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하얀 테이프를 빼곡하게 붙여 출입을 막았다. 내부에는 단 한 점의 작품도 걸려 있지 않다. 입구 오른쪽에는 A4 크기 정도의 안내판에는 "아트페어 기간 중 갤러리신라 부스는 닫혀 있습니다"는 문장과 '로버트 배리(Robert Barry)'의 서명이 적혀 있다.
이 공간 자체가 미국의 개념미술가 로버트 배리(1936~)의 작품 '닫힌 갤러리(closed gallery)'다.
이 작품은 '팔리지 않기 위해' 창작됐다. 많은 고정관념에 도전한 1960년대 실험미술 사조가 가장 처참하게 실패한 목표가 하나 있다. 바로 '비상업성'이다. 땅이 팔리지 않을 거라는 전제로 시도한 '대지 미술'은 땅이 팔리면서 실패했고, 일회성의 힘으로 사라지기를 기대했던 퍼포먼스 작품은 영상과 사진으로 남아 컬렉터의 수장고에 갇혔다. 배리는 결코 팔리지 않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196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처음으로 '닫힌 갤러리'를 선보였다. 전시 장소와 시간 등을 미술 애호가들에게 알렸으나, 텅 빈 전시장 앞에서 관람객들이 느끼는 당황스러움과 재미, 경외에서 예술적 감상을 일으키려는 시도였다.
갤러리신라는 바로 그 지점을 이번 아트페어에 이식했다. 그간 갤러리 공간에만 출품됐던 배리의 작품을 예술품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아트페어에서 시도한 것은 처음이다. 갤러리신라는 2020년 키아프와 지난달 신생 페어 '아트 오앤오'에 이어 이번 '아트부산 2024'에 세 번째로 배리의 작품을 선보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궁극적으로 '팔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 이 작품도 결국 팔렸다는 것이다. 지난달 아트 오앤오에서 한 해외 컬렉터가 상당한 액수를 지불하고 부스 입구의 안내판을 소장하겠다고 한 것.
이준엽 갤러리신라 디렉터는 "아트 테크(예술과 재테크의 합성어), 아트 인베스트먼트(예술 투자) 같은 단어가 범람하는 한국의 시대적 상황에서 이 같은 시도가 미술계에 환기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올해 13회를 맞이하는 '아트부산 2024'는 전 세계 20개국 129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9일 VIP 프리뷰(선공개)를 시작으로 12일까지 4일간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