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인권 후진국'으로 꼽혀온 보수적 이슬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가 27일(현지시간) 유엔의 여성지위위원회(CSW) 의장국으로 선정됐다. 사우디 로비가 힘을 발휘했다는 평이 나오지만, 인권 단체들은 성차별로 악명 높은 사우디가 성평등을 꾀하는 국제기구 의장 자리에 앉은 데 반발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이날 미국 뉴욕에서 열린 CSW 연례회의에서 압둘아지즈 알 와실 주유엔 사우디 대사가 새로운 위원장으로 선출됐다고 전했다. 선출 과정에서 경쟁 후보도, 반대도 없었다고 가디언은 설명했다.
CSW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 산하 위원회로, 해마다 성평등 진전 상황을 평가하고 관련 정책을 수립한다. △아프리카 13개국 △아시아 11개국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 9개국 △서유럽 8개국 △동유럽 4개국 등 45개 회원국이 CSW에 참여하고 있다.
당초 방글라데시가 CSW 의장국에 오를 것으로 관측됐지만, 사우디가 막판 로비를 펼친 끝에 의장국 지위를 가져간 것으로 전해졌다. 가디언은 사우디의 로비를 "왕국의 이미지를 빛나게 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여성 인권을 무시해 온 사우디가 CSW 의장국으로 선출되자 인권단체들은 크게 반발했다. 셰린 타드로스 국제앰네스티 뉴욕사무소장은 "사우디의 여성 권리 수준은 형편없으며, 위원회의 권한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사우디는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3년 세계 성별 격차 보고서'에서 146개국 중 131위를 기록하는 등 성평등 최하위권 국가로 꼽혔다.
가디언은 "사우디 관리들은 여성 권리 진전의 증거로 2022년 제정된 개인지위법을 들었다"고 전했지만, 정작 이 법에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킨 성차별적 규정도 여럿이다. 법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 후견인의 허락을 받아야 결혼할 수 있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아내가 성관계를 거부하거나, '합당한 변명' 없이 남편과의 동거 또는 동반 여행을 거부하면 남편은 재정 지원을 끊을 수 있다.
루이 샤르보노 휴먼라이츠워치(HRW) 유엔 담당 이사는 "사우디의 유엔 CSW 위원장 선출은 모든 곳에서 여성의 권리가 충격적으로 경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사우디 당국은 구금된 모든 여성 인권 운동가를 즉시 석방하고, 남성과 완전히 평등한 여성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