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대공황의 원인 목록에는 노동운동의 긍정적 기능, 즉 은폐된 경제-사회적 병폐의 조기 진단 기능의 무력화도 있었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부가 1933년 국가산업회복법과 35년 노동관계법(일명 와그너법)으로 노동자 단체교섭권 등을 보장하는 등 친노동 정책을 전개한 배경에 그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이 시작되면서 애국주의는 다시 빠르게 부활했다. 1943년 6월 미 의회는 전시산업 안정화를 위해 전쟁노동쟁의법(일명 스미스-코널리법)을 제정했다. 파업에 연방 정부가 개입해 소비재를 포함한 모든 생산품을 연방 정부가 압류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앞서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루스벨트는 사측인 미국산업단체협의회와 미국노동총연맹 대표자를 불러 ‘전시 파업 등 노동쟁의 금지’ 서약을 맺게 했다. 전시 물자 부족과 살인적인 노동 강도, 저임금은 1943년 4월 미국 광산노동자 총파업 등으로 이어졌고 연방 정부는 그 파업을 연방 범죄로 규정해 진압했다.
종전 직후, 즉 전시 무파업 서약이 끝난 1945년 중반부터 저임금과 전시 인플레에 시달려온 노동계의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 탄광 석유 자동차 공공부문 등 500만 명이 넘는 노동자 파업이 46년까지 이어졌다. 1946년 4월 1일 체결된 미국광산노조연합(UMWA)과 당시 내무부의 협정(일명 크루그-루이스 협정), 즉 광산노동자들의 의료-재활과 은퇴 후 복지를 위한 기금 조성 약속(일명 1946년의 약속)은 총파업 기간 노동자들이 거둔 작은 성취였다.
초헌법적인 전시 스미스-코널리법은 종전 후인 1945년 가을 만료됐다. 그러나 후임 트루먼 정부는 1947년 ‘태프트-하틀리법’으로 “국가 경제 안보를 위협하는 파업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산업 생산을 저해하는 모든 노조활동은, 이적 반체제 행위라는 낙인은 매카시즘 이전부터 기승을 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