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한국인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양국관계에서 전례 없는 대형 악재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무기를 공급해온 북한과 밀착하며 한국과 부딪쳐온 러시아가 급기야 '인질 외교'로 압박수위를 끌어올렸다. 추방을 넘어서는 조치를 자제했던 관례를 깬 만큼 문제를 단기간에 풀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방북을 앞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우리 국민을 볼모로 한반도에 개입하려 몽니를 부리고 있다.
12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러시아가 간첩 혐의로 구금한 우리 국민은 목사 백모씨로 파악됐다.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선교활동을 하면서 북한 벌목공과 탈북민 등을 지원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현지 소식통은 "백씨는 지난 1월 중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아내와 함께 넘어온 지 얼마 안 돼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 구금됐다"고 전했다.
백씨는 2020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여행사를 법인 등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씨와 함께 러시아에 입국한 아내는 함께 체포됐다가 혐의 없음으로 풀려나 현재 한국에 있다.
엄구호 한양대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북러가 결속하고 한미도 협력하는 대립 상황에서 이번 사태는 인질 외교의 성격이 있어 보인다"고 평가했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구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는 "한러관계가 미러관계와 연동돼 악화하면서 이 같은 악재가 돌출될 가능성이 상존했다"고 지적했다. '터질 게 터졌다'는 의미다. 주러시아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인사는 "외교채널에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라면서 "공격적인 메시지는 상황을 악화시키기 때문에 물밑에서 신중하게 소통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엄 교수도 "이 일이 크게 확산되면 한러관계를 관리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면서 "일단 차분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사안의 파장을 의식해 극도로 신중한 분위기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현지 공관에서 해당 국민의 체포 사실을 인지한 직후부터 필요한 영사 조력을 제공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기 어렵지만,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기를 기대하고 이를 위해 러시아 측과 필요한 소통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도훈 주러시아 대사도 지난 4일(현지시간)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부 미주·군축 담당 차관과 면담하는 등 러시아 고위 인사들과 대화를 지속하고 있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어떠한 정보도 없으며 언급할 게 없다"고 말을 아꼈다.
돌발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속시원한 설명이 없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우선 러시아가 왜 갑자기 우리 국민에게 간첩 혐의를 적용했냐는 것이다. 그동안 한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정보활동이나 각종 사고에 대해 공개하지 않고 물밑에서 매듭짓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블라디보스토크는 북한-러시아-중국을 연결하는 접경지역이기 때문에 과거부터 선교사의 활동이 많았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활동도 수면 아래에서 다층적으로 이뤄져왔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가 법을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내부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탈북민 구호활동 그 자체도 북러 협력의 단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북측이 백씨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구호활동에 대해 적극적인 정보 공조를 러시아 측에 요청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설령 간첩 혐의나 민감한 혐의가 적용되더라도 러시아가 우리 국민을 추방하지 않고 '체포'한 것도 눈길을 끈다. 한러는 1998년 양국 정보요원을 맞추방하고, 2008년과 2009년에는 러시아가 우리 군무관·외교관을 추방하며 험악한 상황으로 치달았지만 그 정도 선에서 끝냈다. 민간인이 연루된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현안에 정통한 소식통은 "선교사들의 탈북민 지원 문제에 러시아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맞지만, 적발되더라도 적절히 추방하는 쪽으로 해결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안에 대해 정보가 제한적이고 구금자의 신변 안전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FSB이 나섰다는 건 그만큼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은 수사당국 관계자를 인용해 "백씨가 해당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하며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정보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다만 수사당국 관계자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통신은 전했다.
러시아는 백씨를 1월 체포했다. 우리 정부에 알린 건 2월이다. 러시아 당국은 지난달 문서로 우리 정부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이런 문제는 비공개 협의로 처리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한 달 지나 국영매체를 통해 공론화하며 논란을 자초했다.
2월은 한러 양국이 말폭탄을 주고받을 때다. 윤석열 대통령이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북한을 비판하자 러시아는 지난달 2일 외무부를 앞세워 "혐오스럽다"며 윤 대통령을 실명 비난했다. 이에 우리 외교부가 다음 날 "혐오스러운 궤변"이라고 맞받으며 정면 충돌했다. 일각에선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우리 정부를 옭아매려 백씨 구금 사실을 알렸을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당시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차관이 방한해 고위급 대화를 가졌다. 하지만 백씨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우리 정부가 이 사안을 왜 적시에 파악하지 못했는지, 양국 외교채널로 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지도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