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범기업이 져야 할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배상 책임을, 한일청구권 협정(1965년) 수혜 기업 등이 대신해서 부담하도록 하는 '제3자 변제안'. 한일 관계 교착 상태를 풀기 위해 정부가 해법으로 내놓은 이 변제안이 나온 지 1년이 지났지만, 일본 측의 성의 있는 호응을 기대하며 쌓기 시작한 배상금 재원이 벌써 고갈 상태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10일 한국일보 취재에 따르면, 현재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재단)에 모인 기부금은 비공개 요청분을 제외하면 41억6,345만 원에 그치고 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제출받은 '기부금 현황' 속 41억 원의 기부 주체(총 12건)를 살펴보면 절대다수인 40억 원이 포스코의 주머니에서 나왔고, 나머지 기부자들이 낸 금액은 1억6,345만 원에 불과하다. 기타 기부자들은 △서울대총동창회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재일한국상공회의소 △서울대 일본 총동창회 △(주)오토스윙 △이 외 개인 기부자 등이다.
제3자 변제안의 핵심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와 유족들의 배상금과 지연이자를 행안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기업 대신 지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3월 6일 제3자 변제안이 발표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애초 선의 차원의 참여를 기대했던 일본 기업의 기부는 전무했다. 포스코를 제외한 한일청구권 협정의 국내 수혜기업 15곳도 기부금 출연 계획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재단의 금고는 이미 바닥이 보이고 있다. 기부금 41억6,345만 원 중 이미 유족·피해자에게 지급된 판결금은 25억여 원이고, 지급을 거부한 나머지 이들에 대해 법원에 공탁금으로 지출할 금액이 12억여 원이다. 결국 재단엔 5억 원 안팎의 금액만 남아있다.
재단 재원은 이미 동났지만, 대법원의 배상 판결이 이어지면서 변제해야 할 돈은 계속 늘어만 간다. 2018년 대법원 승소를 빼도, 지난해 12월부터 올 1월까지 확정 판결이 난 사건만 9건(52명)이다. 예컨대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지난해 12월 21일 승소한 강제징용 피해자 11명에게는 1인당 1억~1억5,000만 원의 배상금이 지급돼야 한다. 지연이자를 제외하고도 현재 재원으로는 충당할 수 없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이자를 포함한 배상 채권액이 최소 140억 원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국언 이사장은 "1심 판결 시점과 피해 정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패소한 일본 피고 기업이 정상적으로 배상 명령을 이행한다면 지연이자 포함, 1인당 최소 2억5,000만 원을 수령할 것으로 추정된다"며 "피해자 56명 기준 배상 채권액이 이 정도고, 금액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대법원 판결을 받을 소송도 쌓여있다. 현재 대법원에 1건, 항소심 8건, 1심 42건이 계류돼있다. 51건의 재판이 진행 중이라 그만큼 준비해야 할 배상금은 더 늘어난다. 연 12%의 지연이자도 계속 붙는다. 결국 돈은 없고, 돈을 받는 대상만 계속해서 늘어나는 셈이다.
재단은 재원 마련 방법을 고심하고 있으나, 한일 양국 기업이 참여하지 않는 현재 상황에선 뾰족한 수를 내기 어렵다. 재단 관계자는 "(재단 기부금을 늘릴 방안을) 계속 연구하고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일본에 구상권을 청구하거나 수혜 기업에 출연을 요청하는 방안에 대해선 "고려한 적 없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