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크레인기사, IT개발자, 주부... 여성노동자 700명이 거리로 나온 이유

입력
2024.03.08 19:00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국내에서 '여성파업대회' 처음 개최
연차, 조퇴 쓰고 다양한 직군 참여해
"임금 격차 해소, 공공돌봄 강화해야"

"가장이니까 돈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

사회복지사 김모(28)씨는 최근 근무하던 복지센터의 직원 급여 서류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 비슷한 연차의 여성 요양보호사보다 남성 운전기사의 월급이 100만 원가량 많았던 것. 그가 봐왔던 요양보호사의 노동 강도는 운전수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임금 차이에도 놀랐지만, '남성은 가장이라 많이 받는다'는 팀장의 말은 더 충격이었다. 김씨는 "여성도 똑같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데 왜 가장으로 여기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한국에서 '여성파업대회'가 처음 열렸다. 요양보호사, 디자이너, 교사, 정보기술(IT) 개발자 등 다양한 직군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가 한데 모여 낮은 처우를 규탄하고, 돌봄 노동의 가치를 알렸다. 참가자들은 "성별 임금 격차를 해소하고 돌봄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능력으로 평가해 달라"... 여성들의 외침

41개 단체가 모인 여성파업조직위원회(조직위)는 이날 낮 12시 20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3·8 세계 여성의 날 파업대회'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700명 넘게 몰렸다. 이들은 여성의 날을 상징하는 보라색 손수건을 몸에 두르고 "여성이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 "독박 집안일 강요 말고 사회가 책임져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여성의 날은 1908년 이날 미국 뉴욕의 여성노동자들이 화재로 숨진 여성들을 추모하기 위해 노조를 만들고 노동여건 개선과 참정권 보장을 외치며 거리로 나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됐다.

연차휴가, 조퇴 등을 활용해 동참한 참가자 다수는 여성노동자로서 겪는 일터 내 차별을 증언했다. 30년 차 타워크레인 기사 박미성(61)씨는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여자라 월급을 적게 주기도 했다"며 "성별 임금격차 해소는 시급한 과제"라고 힘주어 말했다. IT업계 종사자 조모(41)씨도 "회의에서 같은 얘기를 해도 남성 동료의 말만 받아들여진다. 성별이 아닌 능력으로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다"고 했다.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전업주부나 남성 참가자들도 눈에 띄었다. 주부 이종희(48)씨는 "출산, 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다시 일자리를 찾으려면 갈 곳이 마땅치 않다"면서 "저임금 노동에 몰린 중·장년 여성의 열악한 현실이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장애인 활동 지원사로 일하는 30대 남성 오대희씨는 "성평등을 실현하려면 돌봄의 사회화와 양질의 일자리가 필요하다"며 연대의 뜻을 밝혔다.

아직 '유리천장' 뚫기 어려운 한국

서울 곳곳에서도 여러 여성·시민사회단체가 주관한 기념행사가 개최됐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서울 경동시장과 이화여대 등을 돌며 여성 5,000명에게 장미꽃을 나눠줬다. 기업들 역시 여성 리더와의 소통 행사를 마련하는 등 여성노동자를 배려하려 애썼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여성이 일하기 쉽지 않은 나라다. 6일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은 29개국 중 '꼴찌'를 기록했다. 성별 간 임금격차,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 등을 토대로 산출되는 지표다.

조직위는 여성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으로 5개 요구안을 제시했다. △성별임금 격차 해소 △돌봄 공공성 강화 △일하는 모두의 노동권 보장 △최저임금 인상 △임신중지 건강보험 적용 및 유산유도제 도입 등이다. 2개월간 온·오프라인 설문ㆍ면접조사를 거쳐 여성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진단한 결과물이다. 조직위 관계자는 "한국은 아직 여성노동자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다"면서 "이번 파업대회가 이들이 겪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김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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