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블랙홀' 상급종합병원, 중증치료 집중하고 경증환자 동네 병원으로

입력
2024.01.25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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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부, 올해 3개 병원서 시범 사업
경증환자 줄이고 고난도 치료 집중
손실분 보상금, 중증진료 강화 투입

# 지방 소도시에 거주하는 70대 A씨는 척추질환으로 수년간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부축을 받지 않으면 걷기조차 힘들었고, 급기야 배변 장애까지 생겼다. 동네 병원 의사는 수술을 권하며 진료의뢰서를 발급했지만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된 대학병원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척추 전문의의 외래 진료 일정이 가득 차 있어 차례가 되려면 1년 넘게 기다릴 판이었다. A씨는 수술을 포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종합병원 중에서도 중증질환 치료 역량이 뛰어난 '상급종합병원 쏠림 현상'이 심화되면서 정작 중증 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올해 상급종합병원은 중증·희귀·고난도 치료에 집중하고, 중증도가 낮은 환자는 지역 의료기관으로 연결하는 '중증진료체계 강화 시범 사업'을 시작한다.

25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공개한 '2023년 상반기 건강보험 진료비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6월 국민건강보험 재정에서 나간 요양급여 비용 총 54조8,836억 원 중 상급종합병원 45개에는 10조723억 원이 지급됐다. 약국을 제외한 의료기관 요양급여 비용(43조5,356억 원) 가운데 상급종합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23%로, 전국 모든 의원(12조1,300억 원)에 버금간다.

상급종합병원에서 경증 환자의 외래진료가 늘고 있다는 점은 더 문제다. 상급종합병원 전체 진료비 중 외래비 비중은 2018년 35.4%에서 2022년 36.8%로 꾸준히 상승했고, 지난해에도 36.4%를 차지했다. 외래 내원일수도 최근 10년 사이 23% 증가했다. 이처럼 경증 환자까지 상급종합병원으로 몰리다 보니 정작 중증 환자는 치료 시기를 놓치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날 복지부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의결을 거쳐 시행하는 중증진료체계 강화 시범 사업은 협력체계를 구축해 상급종합병원의 경증 환자를 지역 의료기관으로 분산하는 게 핵심이다. 공모를 거쳐 선정한 삼성서울병원, 인하대병원, 울산대병원이 올해 시범 사업에 돌입한다.

세 병원은 환자 중증도에 따라 진료를 지속할지 판단하고, 경증일 때는 주소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협력의료기관으로 환자를 보내게 된다. 회송 환자가 지역 의료기관에서도 연속성을 갖고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상급종합병원과 지역 의료기관 사이에 진료 정보 공유, 의료진 교육도 이뤄진다. 또 환자 상태 악화 시 상급종합병원으로 신속하게 이송해 우선 진료하는 시스템도 갖춘다.

복지부는 상급종합병원에서 경증 환자 회송과 외래진료 감축으로 발생할 수 있는 손실분을 보상하는 방안도 마련했다. 연간 900억 원씩 4년간 3,600억 원 규모다. 시범 사업 참여 병원이 설정한 외래진료 감축 예상 목표치를 평가해 보상금의 절반은 사전에 지원하고, 나머지 절반은 성과에 따라서 추후 차등 지급한다. 병원들은 보상금을 중증 환자 진료 강화, 지역 의료기관 네트워크 구축 등 사업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복지부는 시범 사업이 성과를 거두면 제도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은 "병원들이 환자를 두고 경쟁하는 비효율적인 체계가 지역 의료, 필수의료 강화를 위해 긴밀히 협력하는 체계로 정상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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