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 입은 대법원장' 나비효과… 무죄 나왔지만 사법부 신뢰엔 치명타

입력
2024.01.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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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권 남용 사태가 남긴 것]
사법부 불신 강화… 법원을 믿지 않아
법원 내부 분위기도 변화, 행정처 논란
"사법부의 비극이자 잔혹사라 평가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황에,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지난해 11월 결심공판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한 임 전 차장이지만, 그 역시나 이 사태가 사법부에 남긴 크나큰 상처의 책임만큼은 인정한 셈이다.

26일 1심에서 '전부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이 사태가 국가 시스템에 가져온 부작용은 컸다. 가장 문제는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는 점. 대법원이 압수수색을 당하고 고위법관들이 검찰청에 소환되는 모습이 계속 비춰지면서, 실체와 무관하게 '법원이 재판을 놓고 정치권과 거래를 했을 수도 있다'는 인식이 여론 기저에 깔리게 됐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던 사법부가 신뢰는커녕, 분노와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선 판사들도 사태 이후 사법 불신을 강하게 체감했고, 심지어 자괴감이 들 정도라고 토로한다. 헌정 사상 최초로 대법원장이 구속된 것이 대국민 신뢰 붕괴에 결정적이었다고 판사들은 입을 모은다. 사태 이후 법복을 벗은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법원 수장이 구속된 이후 사법부 권위가 꾸준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면서 "법원에 온갖 정치적 사건들이 몰려드는데 권위가 없으니, 판결을 통해 해결이 안 되는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사법부 불신으로 시작된 재판 결과에 대한 불만은 고스란히 법관 개인에게 떠넘겨졌다. 특히 유력 정치인 관련 사건들은 어떠한 결론을 내더라도 법관 개인에게 과도한 공격이 집중된다. 지난해 9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구속영장을 기각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유창훈 부장판사를 향한 '신상털이' 등 인신공격이 대표적이다. 영장 기각 이후 대법원 앞엔 유 부장판사를 비난하는 현수막과 근조화환들이 세워졌다. 지난해 말 전국법관회의에선 판사 개인을 향한 과도한 비방에 "법원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안건에 대해 투표했는데 법관 대표 124명 중 91명이 참여해 88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없었다. 그만큼 판사들 사이에 사법부 불신에 대한 심각성이 공유됐고, 넓은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얘기다.

5년이나 이어진 사법농단 재판은 법원 내부 분위기에도 큰 영향을 줬다.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한 사법부의 수직적 서열화와 관료화를 깨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고, 권위적이던 법원의 문화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사태 이후 수평적 분위기가 확산한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급격한 사법개혁으로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고, 부작용 수습을 위한 내부 진통은 여전히 계속 진행 중이다.

양 전 대법원장의 후임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시행한 △법원장 후보 추천제(2019년)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2020년) 등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낳았다. 법원장 후보 추천제는 '인기 투표제'로 전락했다는 비판 끝에 올해 정기인사에 적용하지 않게 됐다. 고법 부장판사 폐지는 법관 사기를 떨어뜨려 인재 유출과 재판 지연의 원흉이라는 일각의 강도 높은 비판을 받고 있다.

사법농단 사태의 진원지로 지목돼 개혁 대상으로 여겨졌던 법원행정처(법원 내 인사·회계 등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조직)의 조직력 약화도 논란 거리다. 김 전 대법원장 시절 위상이 추락했던 행정처는 조희대 신임 대법원장 취임 후엔 다시 위세를 늘릴 것으로 보인다. 조직을 확대하고, 행정처 근무 법관도 증원하기로 했다. 수도권의 한 판사는 "행정처 조직이 급격하게 축소돼 일선 법원 재판 지원 기능 등이 약화돼 내부 불만이 있었다"면서 "행정처 확대는 일선 판사 대부분 동의하는 시급한 해결 과제"라고 말했다.

이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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