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서민의 발’로 불리는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 지프니 존폐를 두고 현지 정부와 지프니 운전사 간 갈등이 커지고 있다. 당국은 대기 오염과 교통 체증의 주범으로 꼽히는 낡은 지프니를 없애고 친환경 차량을 도입한다는 방침이지만, 이들이 내민 보상책이 터무니없는 탓에 운전자들은 ‘결사 반대’를 외치고 있다. 정부의 무리한 차량 교체 움직임이 교통 물가를 끌어올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18일 CNN필리핀 등에 따르면, 필리핀 정부가 합승 차량 지프니 퇴출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곳곳에서 항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6일 수도 마닐라와 주요 도시에서 열린 집회에는 총 1만5,000여 명의 운전자들이 나섰다.
지프니는 필리핀에서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이 버리고 간 군용 지프를 개조해 소형 버스처럼 사용한 데서 시작됐다. 차량이 특정 노선을 따라 달리면 승객들이 타고 내리는 식으로 운행된다.
필리핀에선 한국의 개인택시처럼 개인이 직접 지프니를 구매해 운전해 왔다. 탑승 요금이 약 13페소(약 312원) 수준으로 저렴한 데다, 버스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까지 접근해 매일 수백만 명이 이용하는 ‘교통 실핏줄’ 역할을 하고 있다. 필리핀 교통부는 전체 인구(1억1,000만 명)의 40%가 지프니를 이용해 등교, 통근을 한다고 추산했다.
하지만 지프니는 대기 오염 주범으로도 지목돼 왔다. 대부분 노후한 경유 엔진을 사용한 까닭에 쉴 새 없이 매연을 내뿜었기 때문이다. 도로 한가운데서 승객을 내려주고 태우면서 안전 문제도 적지 않았고, 교통 혼잡을 가중시킨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에 2017년 필리핀 정부는 연식 15년 이상 지프니를 퇴출하고 전기차나 친환경 엔진을 장착한 차량으로 바꾼다는 방침을 밝혔다. 당초 2020년까지 교체를 끝내겠다는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러나 지난해 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정책 시행 일자를 이달 31일로 못 박으면서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기간 내에 모든 지프니 소유주(기사)는 정부 지원을 받는 협동조합이나 법인에 가입하고 2, 3년 이내에 차량을 환경 오염이 덜한 새 모델로 교체해야 한다. 어길 시 운행 면허가 취소된다.
지금까지 수도 마닐라에서 지프니 기사 10명 중 4명이 조합 가입을 신청한 상태다. 남은 60%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다. 조작 방식이나 연식, 제조사 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20인용 지프니 차량은 대략 15만~30만 페소(약 360만~720만 원) 선에서 거래된다. 이를 친환경 차량으로 바꿀 경우 한 대당 약 280만 페소(약 6,700만 원)가 필요하다. 약 10~20배 가깝게 비용이 증가하는 것이다.
정부가 교체 대상 지프니 소유주에게 △대당 30만 페소 보조금 지급 △7년 상환 저리 대출 △3만 페소 안팎의 생계비 지원 등을 제안했지만 차량 구입비에 비해선 크게 부족해 기사들의 분노만 키웠다. 필리핀 지프니 운전자 조셉 사바도는 CNN필리핀에 “우리는 돈을 갚을 여유가 없다. 대출을 받아 (새 전기차를) 사면 죽을 때까지 빚을 갚아도 부족할 것”이라고 호소했고, 40년간 지프니를 몰아온 에밀리오 밀라레스는 “정부의 일방적 정책으로 인해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 끝까지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주 이용자인 서민들 역시 이번 정책이 교통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차량 구매와 대출금 상환 부담이 요금에 전가될 수 있어서다. 필리핀 경제 싱크탱크 IBON재단은 “지프니 교체 정책으로 교통요금이 300~400%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