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제품 가운데 투명페트병은 최고의 재생원료로 꼽힌다. 색깔이 없고 불순물이 적어 식품용기로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 고품질 재생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2020년 12월부터 투명페트병만 따로 수거하고 있다. 기업들도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의 일환으로 앞다퉈 재생페트 활용 제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지난해 투명페트병 재활용률은 정부가 당초 정한 재활용의무율 80%를 채우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무부처인 환경부가 연간 의무율을 도중에 낮추는 이례적 결정을 내린 사실도 확인됐다. 이에 따라 의무율을 달성하지 못한 기업들은 부과금을 상당 부분 면제받게 될 전망이다.
18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환경부는 지난해 12월 29일 투명페트병 재활용의무율을 76.3%로 낮췄다. 규정상 경제상황 변동, 천재지변 등이 있으면 이처럼 의무율 중간 조정이 가능하긴 하나, 실제 조정된 사례는 코로나19가 유행했던 2020년뿐이다.
재활용의무율은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의 일환으로, 기업이 생산한 포장재의 일부를 반드시 재활용하도록 책임을 지운 것이다. 의무율을 달성하지 못한 기업은 부족분만큼 재활용부과금을 내야 한다. 원칙대로라면 지난해 80%를 채우지 못한 기업은 부과금을 내야 하지만 의무율이 하향 조정되면서 부담을 덜어낸 셈이다.
환경부는 기업들이 부과금을 면제받는 대신 EPR 관계기관인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에 적립금을 출연하게 하고 재활용 촉진 사업에 쓴다는 방침을 세웠다. 환경부 관계자는 "지난해 투명페트병 재활용률이 최종 집계되지 않았지만 하향 조정된 의무율 76.3%도 밑돌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환경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지난해 생산된 투명페트병 재생원료가 수요·공급 환경 변화로 인해 충분히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명 페트는 분쇄 공정을 거쳐 플레이크(얇은 조각)나 펠릿(작은 알갱이) 형태의 재생원료로 만들어 제품 제작에 쓰이는데, 현행 규정은 재생원료로 실제 제품이 만들어져야 재활용 실적으로 인정한다. 환경부 관계자는 “지난해 재활용률이 낮았던 건 생산자의 의지 부족이 아니라 시장 혼란에 따른 불가피한 상황 때문”이라며 “기업에 (부과금 등) 책임을 지우기에 무리가 있어 의무율을 조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재생원료가 팔리지 않은 이유는 역설적으로 투명페트병의 인기 때문이다. 최근 유럽연합(EU)은 탈플라스틱 정책에 따라 내년까지 플라스틱제품 원료의 25%를 재생원료로 충당하게 했다. 미국의 일부 주도 비슷한 규제를 도입했다. 우리나라 역시 유사한 의무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내수든 수출이든 미리 재생원료를 확보해야 하는 유인이 생긴 것이다.
이로 인해 기업들이 분쇄 전 압축된 형태의 투명페트병을 미리 매입하는 상황이 지난해 벌어졌다고 한다. 압축품 가격이 오르면서 재생원료 가격도 따라 올랐고, 이는 재생원료의 주요 구입처였던 섬유시장의 수요를 기존의 60%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과잉 공급 문제도 있었다. 2022년부터 정부가 식품용기 제작에 재생원료 사용을 허용하면서 수요 증가를 예상한 재활용업체들이 재생페트원료 생산을 늘렸지만, 정작 이를 찾는 용기 제작업체가 드물었다. 재생원료 사용이 의무가 아닌 데다가 워낙 초기라 선뜻 구매에 나서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환경부는 이런 시장 상황이 당분간 개선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올해 재활용의무율도 76.8%로 설정했다. 장기재활용목표율(84.6%)을 감안하면 계속 올릴 필요가 있지만 상황 논리를 들어 반대로 간 것이다.
재활용업계는 이 같은 목표율 하향이 재활용 후퇴로 이어질 거라고 우려하고 있다. 경기도의 A재생페트업체 관계자는 “이미 생산한 재생 펠릿이 쌓여 있고 이게 팔리기만 하면 재활용률은 쉽게 달성할 수 있다”며 “지난해 상황이 특수했던 만큼 정부가 수요 창출을 지원하면 될 텐데 재활용목표율을 낮추는 건 수요 촉진과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정부가 과도기적 상황에 성급하게 반응하며 정책 안정성을 떨어뜨렸다는 주장도 나온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지난해는 실제 재활용이 잘됐지만 단지 실적으로 집계가 안 된 것뿐인데 이를 이유로 의무율을 낮추는 조치를 한다면 전반적인 시장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의무율이 크게 하향 조정되면서 재활용 수요와 투자가 줄어드는 후유증이 우려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