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일감 몰아주기 등 사익편취 행위로 법인을 검찰에 고발할 때 총수 일가도 원칙적으로 함께 고발하는 방향으로 지침 개정을 추진하다가 이를 철회했다. 추진 두 달 만에 재계 반발에 밀려 개정안을 백지화한 것으로, "재벌 입김에 밀린 공정위"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공정위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등의 위반 행위 고발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 지침(고발 지침)'을 개정해 28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지침 개정의 핵심이었던 '법 위반 정도가 중대한 법인의 사익편취 행위에 지시·관여한 특수관계인도 원칙적으로 같이 고발한다'는 내용은 빠졌다.
공정위의 '총수 고발 지침' 추진은 3월 대법원이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의 재판에서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오너의 직접 지시 증거가 없더라도 '관여'만으로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속도가 붙었다. 그 결과 10월 '공정거래법 고발 지침 개정 행정예고안'에는 총수 일가 고발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당시 공정위는 "공정위 조사만으로는 총수 일가의 관여 정도를 명백히 입증하기 곤란해 총수 일가를 고발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았다"며 "총수 일가를 원칙 고발 대상으로 규정, 검찰 수사를 통해 특수관계인의 관여 정도를 명백히 밝힐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재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한국경제인협회등 6개 경제단체는 "고발 지침의 고발 사유와 기준이 모호하고 상위법과도 충돌한다"며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고, 결국 총수 고발 지침 추진은 없던 일이 됐다. 두 달 뒤 발표된 개정안에는 총수 일가에 대한 원칙 고발 규정은 쏙 빠졌고, 조항 일부만 추가됐다. 기존 고발 지침에는 4가지 고려 사항이 담겼는데, △시장에 미친 파급 효과 △중소기업 또는 소비자 등에 대한 피해 정도를 고려하겠다는 조항이 새로 포함됐다.
전문가들은 공정위가 재벌의 힘에 밀려 제도 개선을 포기했다고 지적했다. 수사권이 없는 공정위가 총수 일가에 대한 조사의 한계를 언급했으면서도, 이를 보완하는 지침 마련은 포기했다는 것이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공정위가 고발 지침을 만들어놓고도 잠재적 처벌 대상자가 반발한다는 이유로 물러선 것은 우리 사회에서 재벌의 힘이 이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자동 고발할 경우 검찰과 법원에서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데, 전속고발권이 있는 공정위가 나서지 않으면 적극적인 수사가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재계에서는 '내부거래 보고만 받아도 고발당하는 것 아니냐'는 사실과 다른 오해를 하고 있어서 경영자들의 불안을 해소해 주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며 "법인을 수사하던 검찰이 총수 일가에 대해 고발 요청을 하면 공정위는 의무적으로 고발하게 돼 있고, 대법원이 총수 일가의 '관여' 행위에 대해 폭넓게 인정한 만큼 공정위도 더 적극적으로 들여다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