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두 개의 전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남미에서도 전쟁 위기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 베네수엘라가 이웃 국가인 가이아나의 영토 75%가량을 강제 병합하려 하는 탓이다. 화약고는 2015년 대규모 원유가 발견돼 인구 81만의 소국 가이아나를 순식간에 자원 부국으로 만든 지역인 ‘에세퀴보(Esequibo)’다. 물가상승률이 200%에 달하는 등 경제 파탄으로 허덕이고 있는 베네수엘라가 군침을 흘리는 이유다.
13일(현지시간) 라틴아메리카·카리브국가공동체(CELAC) 의장국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총리실은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이르판 알리 가이아나 대통령이 14일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에서 만날 계획이라고 밝혔다. 회담에는 세 나라뿐 아니라, 브라질과 카리브해 국가 등 주변국 및 유엔 관계자 등도 참석해 분쟁 해결 방안을 논의한다.
그러나 평화적 해법의 도출 가능성은 크지 않다. 가이아나에선 베네수엘라와의 정상회담 자체를 반대하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12만 명 이상 국민이 사는 멀쩡한 영토를 내놓으라는 베네수엘라의 ‘생떼’에 빌미를 줘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알리 대통령도 회담에 앞서 “국경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해결한다.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다”고 못 박았다.
실제 에세퀴보는 100년 넘도록 가이아나 영토로 존재해 왔다. 이 나라 전체 면적의 4분의 3(16만㎢)에 달하는데, 1899년 ICJ의 전신인 중재재판소 결정에 의해 가이아나 땅이 됐다. 하지만 베네수엘라는 국경 확정 당시 가이아나가 영국 식민지였다는 점을 들어 ‘영토 분쟁은 양국 간 협의로 해결하라’는 1966년 제네바협약에 따라 재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에세퀴보에서 원유와 천연가스 등이 발견되자, 베네수엘라의 영유권 주장은 더 거세졌다. 국민 1인당으로 따지면 이 지역 원유 매장량은 ‘석유 부국’ 사우디아라비아를 능가한다. 게다가 품질도 전 세계 석유 매장량 1위 국가인 베네수엘라산보다 좋아 경제성에선 앞선다.
마두로 정부는 지난 3일 에세퀴보를 자국에 편입시켜 ‘과야나 에세퀴보주(州)’로 만들겠다는 국민 투표를 강행했고, 찬성표 비율은 95.9%였다고 밝혔다. 이에 더해 군사적 압박도 가하고 있다. 국경 지대에 군 병력 배치를 늘린 것은 물론, 국영석유회사에 자원 탐사·개발 허가권을 부여하면서 가이아나 기업에는 “3개월 이내에 떠나라”고 경고했다.
마두로 대통령의 속내는 내년 3선 도전을 앞두고 ‘외부의 적’을 만들어 지지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웃과의 분쟁은 베네수엘라인들을 끔찍한 경제 상황에서 시선을 돌리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싱크탱크 미주간대화(IAD)도 “마두로는 (가이아나를) 침공하지 않더라도, 2024년까지 분쟁을 끌고 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다수 전문가 역시 실제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다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사례에 비춰, 안심은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전쟁이 발발하면 군 병력이 4,070명인 가이아나가 러시아 지원을 받는 35만1,000명의 베네수엘라군을 상대하기란 버겁다. 바라트 자그데오 가이아나 부통령은 “미국 등 동맹국과 강력한 국방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고 FT에 말했다.
미국 정부는 가이아나 정부에 ‘무조건적 지지’를 표명했다. 미 석유기업 엑손모빌이 에세퀴보 석유 탐사를 주도하는 터라 영유권 분쟁 여파는 미국에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두 개의 전쟁’에 발을 깊숙이 담근 터라, 또 다른 무력 충돌 발생은 상당한 부담이다. 줄리아 벅스턴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는 “미국 입장에선 혼란스러운 외교·안보 의제를 또 떠안게 되는 셈”이라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