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에 위증까지 한 안기부 수사관... 소송 걸었지만 '소멸시효'로 배상 면책

입력
2023.12.1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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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영장 없이 연행돼 고문받고 자백
재심에선 고문했던 수사관이 거짓증언
위자료 청구했지만 '3년 소멸시효'에 기각

5공화국 시절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 수사관이 무고한 시민을 고문해 사건을 조작한 것도 모자라, 나중에 민주화 이후 이 시민의 무고를 밝히는 재심에 증인으로 출석해 위증까지 했던 일이 있었다.

피해자 유족이 아직 살아 있는 이 전직 수사관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법원은 수사관이 손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유족이 정해진 기한(소멸시효) 안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게 문제라고 봤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27단독 박재성 판사는 고 심진구씨 유족들이 전직 안기부 수사관 구모(80)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지난달 28일 원고 패소 판결했다.

심씨는 1986년 북한을 찬양하는 이적단체인 '민족해방노동자당'을 결성하려 했다는 혐의로 안기부에 영장 없이 연행됐다. 심씨는 구씨 등에게 성기를 몽둥이로 맞는 등 37일 동안 고문을 당했고, 결국 혐의를 인정한 끝에 1987년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확정받았다.

심씨는 2011년 구씨 등의 가혹행위 탓에 허위로 자백했다고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재판에 증인으로 나선 구씨는 "나와 다른 수사관이 심씨를 고문한 적이 없고 심씨가 자백한 것"이라고 잡아뗐다. 그의 위증에도 불구하고 심씨의 무죄는 2013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심씨 사망 후 유족은 국가배상 소송을 청구해 2016년 최종 승소했고, 재심에서의 허위 증언을 문제 삼아 구씨를 위증 혐의로 고소했다. 위증 사건 재판부는 "공안사건과 관련하여 불법 연행된 뒤 안기부에서 가혹행위를 받지 않았다는 건 이례적"이라며 구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고, 2020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어 유족들은 지난해 구씨를 상대로 8,000만 원 상당의 정신적 손해배상금(위자료)을 청구했다.

위자료 소송을 담당한 이번 재판부도 손해배상 의무는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구씨의 허위진술로 인해 기존의 유죄 판결이 유지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심씨가 유죄 판결을 받을지도 모를 위험에 노출되었으므로 심씨와 유족들은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재판부는 유족들이 너무 늦게 소송을 제기해 구씨의 배상 책임이 사라졌다고 봤다. 재판부는 "유족들은 국가배상 승소 판결이 확정된 2016년에는 구씨의 위증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했다고 봐야 한다"며 "그로부터 3년 안에 소송을 제기했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현행 민법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자 등이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가 지나 소멸한다. 소멸시효는 손해배상 청구권을 무제한 보장할 경우 법적 안정성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다.

재판부는 "구씨의 위증 혐의가 형사 판결의 유죄로 확정될 때까지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어려웠다"는 유족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맨 처음 날짜(기산점)는 형사사건 소추 여부나 가해자에 대한 형사판결의 확정 여부와는 관련이 없다"는 이유였다.

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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