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전두환 정권 때 이른바 '프락치(신분을 속이고 활동하는 정보원)' 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에게 손해를 배상하라며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앞서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상규명 절차를 거쳐 피해 사실을 공개한 지 1년 만에 나온 사법부의 첫 판단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6부(부장 황순현)는 22일 이종명·박만규 목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3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는 원고들에게 각각 9,000만 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선도 업무의 일환으로 불법 구금·폭행·협박을 당하고 일명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사실 등이 넉넉히 인정된다"며 "이로 인해 원고들이 큰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임은 경험칙상 자명하기에 국가에 위자료 배상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이 목사 등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육군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과 구타를 당한 뒤 동료들의 동향을 감시·보고하는 프락치 활동에 투입됐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은 '녹화(綠化)사업' 명목으로 학생운동 가담자 등을 강제징집한 후 이들을 비밀정보원 삼아 군과 학교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5월 조사에 착수해 그해 11월 강제징집 및 녹화·선도 공작 관련자 명단을 확인했다.
진실화해위 발표를 근거로 피해자들은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재판 과정에서 진실화해위 조사만으로 책임 입증이 어렵고, 손해배상 청구의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날 "국가는 이미 과거사정리법을 제정하면서 역사적 진실 규명과 피해 회복을 선언했고, 이는 국가배상의 방법도 수용하겠다는 취지였다"며 "이제 와 새삼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지적했다.
박 목사는 선고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진실화해위 결정이 나온 뒤 국가의 구제책이나 사과를 기대했지만 결국 법원 판단을 받게 됐다"며 "인권 최후 보루인 법원이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해줘 다행스럽다"고 소회를 밝혔다. 원고들을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는 "국가배상 판결은 단순히 당사자들의 권리 구제를 넘어 위법한 행정을 통제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면서 "법원이 인정한 위자료가 과연 국가에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질 만큼의 금액인지 좀 더 논의해 항소 여부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