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선율과 레퍼토리의 확장성'… 빅3 오케스트라가 남긴 것

입력
2023.1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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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일 빈 필·RCO·베를린 필 내한 연주회 리뷰
베를린 필, 상주음악가 된 조성진 협연으로 일찌감치 매진
RCO, 오페라처럼 역동성 돋보인 차이콥스키 연주
빈 필, 관현악 레퍼토리 확장성에 기여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지난 한 주(7~12일)는 벅찬 감동의 시간이었다.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 세 곳의 내한 연주회가 이 한 주에 집중됐다. 세계 각지의 명문 악단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미뤄 뒀던 해외 투어를 지난해 들어서야 본격화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7~8일 서울 예술의전당), 네덜란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11~12일 서울 예술의전당)은 연일 황홀한 선율과 함께 여러 뒷이야기를 남겼다.

'조성진 있기에'… 매진 기록한 베를린 필

올가을 클래식 음악계의 화려한 공연 라인업은 연초부터 음악 팬을 설레게 했지만 동시에 출혈 경쟁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우려대로 이들 세계 최강 명문 중 전석 매진을 기록한 악단은 베를린 필뿐이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협연한 12일 회차는 예매 시스템 서버 마비 해프닝까지 빚으며 일찌감치 매진됐다. 전반적 물가 상승 속에 티켓 가격이 고공 행진한 영향도 컸다. 베를린 필의 최고가 티켓은 55만 원, 빈 필은 48만 원, RCO는 45만 원이었다.

6년 만에 내한한 베를린 필은 화제성 면에서 단연 우위였다. 악단은 공연을 하루 앞둔 10일 조성진의 베를린 필 상주음악가 선정 소식을 전하며 음악계 뉴스의 중심에 섰다.

조성진이 협연한 12일 1부의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4번은 베토벤다운 강력한 에너지보다 섬세한 서정미가 부각되는 곡이다. 비교적 단순한 선율에 복합적 감정을 실어 표현해야 하는 난곡이기도 하다. 적정한 음색과 셈여림의 대비를 통한 교과서적 연주를 주로 해 왔던 조성진은 이날 이전보다 좀 더 과감한 터치로 관객을 열광케 했다. 앙코르곡으로 선택한 리스트의 '순례의 해', 두 번째 해 '이탈리아' 중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에서는 조성진 특유의 정교하면서도 섬세한 선율이 돋보였다.

2019년부터 상임 지휘자로 악단을 이끌고 있는 키릴 페트렌코는 악단의 전체적 음색보다는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해 세부적 음악 표현을 살리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지휘자로 보였다. 2부에서 들려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는 작곡가 자신의 삶이 투영된 곡이다. 심술궂은 평론가를 상징하는 '영웅의 적들' 파트의 목관악기, 아내를 표현한 '영웅의 반려자' 파트의 유려한 바이올린 독주(악장 다이신 가지모토) 등 솔리스트들이 남긴 인상이 특히 강하게 남았다.


RCO가 입증한 러시아 명곡의 진가

RCO는 '세계 최고'라는 명성 외에 스타 협연자도, 눈에 띄는 신선한 연주곡도 없어 상대적으로 화제성은 부족했다. 협연자는 러시아 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먼, 메인 프로그램은 국내에서 자주 공연돼 '사골 레퍼토리'로까지 불리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었다.

하지만 RCO는 빈번하게 연주되는 곡이야말로 명가 오케스트라의 내공을 드러내는 데 최적의 수단임을 방증해 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수석 지휘자를 지낸 이탈리아 출신의 파비오 루이지가 맨손으로 지휘한 2부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은 오페라처럼 극적이었다. 템포에 변화를 준 루이지의 곡 해석에 정점을 찍은 것은 단원들의 뛰어난 연주력이었다. 극도로 느리게 시작한 1악장부터 곡 후반부로 가며 조금 빠르게 또는 조금 느리게 템포가 바뀌는 순간에도 단원들의 합과 온화한 음색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한동안 많은 악단의 레퍼토리에서 배제됐던 차이콥스키 음악의 아름다움을 새삼 일깨운 무대이기도 했다. 앙코르곡 역시 차이콥스키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중 폴로네즈였다.

앞서 1부에서 브론프먼은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풍성하고 다채로운 색채의 연주를 들려줬다. 20분 남짓한 단악장 형식의 곡으로도 거장으로서의 그의 면모는 충분히 빛났다. 브론프먼은 온몸으로 애써 표현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 묵묵히 앉은 채로도 소리의 볼륨감과 섬세한 울림을 자유자재로 빚어냈다.

빈 필, '낯선 레퍼토리도 흥미롭게'

명문 악단 동시 내한 공연의 포문을 연 빈 필은 관현악 레퍼토리의 확장성을 발견하는 재미를 선사했다. 악단은 러시아 출신 지휘자 투간 소키에프와 함께한 이번 연주회에서 올해 여러 악단이 선보인 브람스 교향곡 1번과 더불어 국내에서 자주 연주되지 않는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과 베토벤 교향곡 4번 등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7일 연주한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은 소키에프의 핵심 레퍼토리 중 하나다.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을 이끌며 음반 녹음도 남긴 곡이다. 지휘봉 없이 맨손으로 포디엄에 선 소키에프는 때로는 등을 활처럼 젖힌 채, 때로는 손가락을 움직여 가며 온몸을 써서 지휘했다. 악단은 1941년부터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의 작품을 연주하는 신년 음악회를 열며 다져 온 박자감을 자랑하면서 생동감 있는 연주를 들려줬다. 연주 시간이 40~45분에 이르지만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빠른 속도의 2·4악장이 인상적이었다.

8일 연주회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4번의 색다른 매력을 알게 해줬다. 3번 '영웅'과 5번 '운명' 사이의 4번은 상대적으로 자주 연주되지 않지만 이날 연주에선 낭만적 감성이 풍부하게 느껴졌다. 2부에 들려준 브람스 교향곡 1번은 전날 보여준 뛰어난 박자감에 정교함까지 더해진 완성도 높은 연주였다.

이제 가을 오케스트라 대전은 조성진이 협연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15~16일)와 피아니스트 임윤찬(26·29일·12월 1일), 바이올리니스트 주미 강(30일)이 협연하는 뮌헨 필하모닉이 바통을 이어받으며 막바지로 접어든다. 임윤찬은 공교롭게도 조성진이 베를린 필과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으로 관객과 만난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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