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호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덮친 지난해 9월 6일, 중학생 아들 손을 잡고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를 빼러 갔다가 폭우에 고립돼 16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김은숙(52)씨. 김씨는 함께 갇혔다가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 아들 김주영(당시 15세)군을 떠올려도, 이제 눈물을 쏟지 않는다. 비록 10여 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떠났다고 생각해서다.
김씨가 이렇게 마음을 먹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다. 그는 7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처음엔 길에서 주영이 또래 모습만 봐도 왈칵 눈물이 나 온종일 울고 목이 메어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도저히 더 살 수 없겠다 싶었을 때 주변에서 손을 내밀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치료 권위자인 이영렬 경북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장이 김씨와 김씨의 가족들을 찾아 심리 치료를 해준 게 큰 힘이 됐다. 교회 신자들의 관심과 위로도 그를 일으켜 세워줬다. 김씨는 9일 포항시 흥해종합복지문화센터에서 열리는 ‘마음건강 토크콘서트’의 발표자로 나선다. 트라우마 극복 과정을 알리고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용기를 냈다.
그날의 그 사고 이후, 김씨 앞을 가로막은 건 아들을 잃은 슬픔만이 아니었다. 전기가 끊어지고 동굴처럼 깜깜한 지하주차장, 깊은 바다에 빠진 것처럼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물을 들이마시며 숨조차 쉴 수 없었던 고통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는 “어릴 때 앓았다 완치된 천식이 다시 생겼고 심장 쪽이 너무 아파 종합병원에 가면 정신과, 호흡기내과, 심장내과까지 3군데를 들러야 했다”며 “음식을 잘 먹지 못해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들로 겨우 버텼다”고 털어놨다. 자동차는커녕 엘리베이터도 타지 못했다. 한겨울에도 아파트 현관문까지 문이란 문은 다 열고 지내야 할 정도로 공황장애에 시달렸다.
김씨뿐 아니라 늦둥이 막내를 잃은 가족들의 삶도 무너졌다. 참사 당일 흙탕물로 가득 찬 지하주차장을 내려다보며 발만 동동 굴렀던 김씨 남편은 죄책감에 빠졌다. 길을 걷다가도, 주말농장에서 채소를 가꾸다가도 갑자기 대성통곡하며 술로 괴로움을 달랬다. 동생을 떠나보낸 김씨의 두 딸도 피폐해졌다. 결혼해 초등학생 자녀를 둔 큰 딸과 직장을 다니던 둘째 딸은 원래 살던 경북 구미시로 돌아가지 않고 내내 동생 방에서 지냈다.
이때 포항시 주선으로 이 센터장을 만났다. 이 센터장은 주치의처럼 김씨와 가족들을 자주 찾았다.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며, 각자가 슬픔과 공포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김씨는 “센터장님과 엘리베이터를 타 보고 승용차에 올랐다가 다음에는 운전대를 잡으며 서서히 차를 몰고 나갈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남편과 두 딸도 차츰 회복됐다. 딸들은 얼마 전 구미로 돌아갔다.
교회 신자들도 힘을 보탰다. 그는 “목사님과 교인들이 틈틈이 찾아와 기도해주고 음식까지 해 주며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고 고마워했다. 7월에는 사고로 가족을 잃은 비슷한 처지의 교인들이 3박 4일간 함께 하는 상실극복세미나에 참석했다. 김씨는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도움이 됐다”고 했다.
물론 상실감과 트라우마를 완전히 이겨낸 건 아니다. 김씨는 여전히 잘 못 먹고, 모든 문을 열어놓고 지낸다. 그러나 과거와 달라진 건 참사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엔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만둔 피아노 학원 강사 일도 다시 시작했다. 그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시간이 정말 행복하다”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들을 보낸 뒤 우연히 얻은 두 마리의 고양이 ‘치즈’와 ‘마루’도 삶의 활력소다.
주영군을 포함해 7명의 목숨을 앗아간 포항 지하주차장 참사 이후에도 비통한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이태원 참사, 충복 오송 참사, 채 상병 순직 사건 등. 가족을 잃은 아픔을 감당하는 건 여전히 유족의 몫이다. 그들에게 김씨가 당부의 말을 건넸다.
“아들을 먼저 보낸 엄마도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어요.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유족들이 있다면 용기를 내세요. 당신은, 우리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