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발사체 '누리호'(KSLV-Ⅱ)가 세 차례 발사에 성공하면서 우주산업의 축을 정부에서 민간기업 중심으로 옮기는 '뉴 스페이스' 시대의 서막이 열릴 거란 기대가 높아졌지만, 정작 우주개발 현장에선 잡음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주개발을 주도해온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소속 연구원들이 민간기업 이직과 함께 누리호 기술을 유출하려 했다는 의심이 불거진 게 사태의 발단이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고발로 검찰이 강제수사에 돌입하면서 연구인력 이동은 제동이 걸렸고, 자연스러운 기술 확산마저 경직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모습이다.
3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항우연 소속 연구인력의 민간기업 이동이 본격화한 것은 지난 5월 25일 누리호 3차 발사 성공 직후다. 지난해 12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한국형 발사체 체계종합기업으로 확정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한화에어로는 누리호 3기 제작을 주관했고 향후 3차례 예정된 반복 발사에도 참여하기로 결정되면서, 누리호 설계 노하우 등의 기술을 이전받기 위해 항우연과 협상을 진행 중이다. 아울러 올해부터 10년간 추진될 예정인 차세대 발사체(KSLV-Ⅲ) 개발사업 공모에도 응모해 향후 상업용 발사체 기업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먼저 한화에어로 이직이 알려진 조광래 전 항우연 원장은 항우연 연구인력의 이직이 '기술 이전 및 민간기업 육성' 차원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조 전 원장은 2일 대전 모처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앞서 한화에어로 측이 영입 제안을 해왔지만, 5월 누리호 3차 발사 임무를 완료하고 나서 항우연을 떠나기로 했었다"면서 "이후 8월 한화에어로에서 우주 분야 대규모 경력직 채용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10여 명이 합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전 원장은 이어 "지금까지는 정부 주도로 발사체 기술을 실현시키는 데 힘썼다면, 이제는 인력과 기술이 민간으로 이동해 경제성 있는 발사체를 만드는 게 중요한 시점"이라면서 "미국, 일본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강조했다.
연구원 개개인의 직업 선택에 의한 인력 이동은 차치하고라도, 기술 유출 시도로 의심되는 행위에 대해서는 위법성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검찰은 지난달 31일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과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한화에어로로 이직하려던 항우연 연구원 4명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이들은 발사체 기술 관련 자료를 별도로 저장하는 한국형 발사체 정보관리시스템(IDMS)에 접속해 다량의 자료를 내려받고, 업무용 PC에 부착된 하드디스크를 외부로 반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전 원장은 "IDMS에서 내려받은 자료는 보안이 걸려 있어서 외부로 반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외부로 나갔다 하더라도 파일이 열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5월 누리호 3차 발사 이후에도 발사체 관련 자료를 과다 열람한 것 역시 의심을 받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난해 11월 발사체개발사업본부가 해체되고 임무리더 중심으로 업무가 재편되면서, 팀장급 역할을 수행하던 연구원들이 임무리더의 요청에 따라 자료를 열람한 것이고, 이를 요청한 이메일도 증거로 남아 있다"고 했다. 자료 열람이나 하드디스크 반출이 연구 또는 업무 목적일 뿐 기술 유출 의도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들이 누리호 3차 발사가 마무리된 시점부터 퇴직을 앞둔 시점까지 평소보다 훨씬 빈번하게 자료를 열람하거나 내려받은 점, 해당 자료들이 민간기업 이직 과정에서 연봉 등 개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면밀히 따져 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산업계의 기술 유출 범죄를 수사하는 한 수사기관 관계자는 "'연구 목적으로 자료를 취득했다'는 건 기술 유출 사건에서 피의자들이 흔히 항변하는 논리 중 하나"라면서 "기술을 외부로 유출해서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부정하게 취득하는 행위만으로도 현행법에 저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통상 기술 유출 범죄라고 하면 반도체·배터리 등 국내 기업의 첨단기술을 국외로 빼돌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항우연 사태는 정부가 국가 주도로 개발한 기술을 국내 기업에 이전해 산업화를 촉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만큼 일반적인 기술 유출 사안과 차이가 있다. 한편에선 기술 이전을 독려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관련 보안을 강화해야 하니 정부로선 딜레마다. 국가가 장기간 우주 기술을 주도해왔다가 이제 막 이전이 시작된 만큼 산업 보안이 충분히 강화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손승우 한국지식재산연구원장은 "이 사건의 쟁점은 국력이 투입된 중요한 기술 자료들을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들고 나갔느냐의 여부가 될 것"이라면서 "퇴직한 과학자들이 민간으로 이직해 기술을 전수하는 것은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이상적인 방향임에도 우주산업 영역은 그간 주목이 덜했다 보니 산업 보안 정책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꼬집었다.
이번 사건이 뉴 스페이스 흐름의 걸림돌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적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우주정책 전문가는 "연구원들의 기술 유출 관련 잘잘못은 가려야겠지만, 우주 관련 공론장에서는 '기술 이전은 사람이 가야 진정한 이전'이라는 목소리도 높다"면서 "위법 행위만 없다면 국가 연구개발사업의 성과가 민간으로 이전되는 것은 기술 '확산'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