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이 남중국해(필리핀 공식 명칭은 서필리핀해)의 이름 변경을 두고 시끄럽다. 정부는 중국의 해양 생태계 파괴를 고발하는 국제 소송을 앞두고 국제사회의 보편적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필리핀'을 명칭에서 빼려 한다. 대신 '아시아해'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여론은 필리핀이 영유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반대한다.
31일 필리핀 일간 마닐라불레틴 등에 따르면, 필리핀 법무부는 중국의 해상 환경파괴 행위를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 제소할 때 환경이 파괴된 지역 이름을 현재의 ‘서필리핀해(West Philippines Sea)’가 아닌 ‘아시아의 바다(Sea of Asia)’로 바꿔 소송을 제기하자고 제안했다.
필리핀 정부는 중국 민병대가 자국 배타적경제수역(EEZ)에 무단 진입해 산호초를 채취하고 파괴했다고 본다. 지난 9월 필리핀 해양경비대는 형형색색 군락을 형성했던 산호들이 하얗게 말라 부서진 수중 영상을 공개했다. 내년 초 손해배상 등 법적 조치에 나설 예정인데, 이때 사용할 공식 명칭을 변경하자는 게 요지다.
남중국해라는 이름은 1930년대 미국 지도제작자가 중국 남쪽과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가 접하고 있다는 뜻을 담아 붙였고, 국제적으로 통용됐다. 중국이 "'남중국해'라는 이름에 '중국'이 들어 있으니 우리에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자 필리핀은 2012년 ‘서필리핀해’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역시 자기 위치를 기준 삼아 각각 ‘나투나해’와 ‘동해’라고 명명했다. 중국의 영유권 주장을 배제하려는 의도였다.
필리핀 정부가 '아시아해'라는 무국적 이름을 꺼내 든 건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헤수스 크리스핀 레물라 법무장관은 “남중국해 해로가 전 세계의 자원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며 “소송의 핵심도 중국과 필리핀의 영토 분쟁이 아닌 중국의 환경 파괴에 있다”고 설명했다. 바다 이름에 ‘필리핀’이라는 단어를 배제해 역내 긴장을 초래할 여지를 차단하고, 중국에 대한 이웃 국가들의 불만을 한데 모으겠다는 얘기다.
정치권은 반발했다. 야당인 민족주의인민연합 소속 그레이스 포 상원의원은 “명칭 변경은 해양 전문가들과 협의해야 할 문제”라며 “섣부른 결정이 분쟁 해역에서 필리핀의 영해권 주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필리핀 대통령의 아들 징고이 에스트라다 상원의원도 “서필리핀해라는 단어는 정부가 지정학적 이유로 지정한 것이며, 2016년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싼 PCA소송 때도 이 이름을 사용해 승리했다”고 반대했다. 이름을 바꾸겠다는 측과 고수하겠다는 측 모두 주권을 지키겠다는 목적은 같지만, 해결 방법이 다른 셈이다. 양측의 입장이 팽팽하게 갈리고 있어 내년 초 소송을 낼 때까지 논란이 이어질 전망이다.
필리핀처럼 영해권을 둘러싸고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은 1992년부터 ‘동해/일본해 병기’를 공식 입장으로 삼고 있다. 정부와 학계의 노력으로 전 세계 지도에서 병기 비율은 2002년 2.8%에서 20여 년 만에 40%로 훌쩍 뛰었다. 바다 이름의 국제 표준을 정하는 국제수로기구(IHO)는 2021년부터 표준 해도집에 동해나 일본해 대신 중립적인 고유 식별번호로 쓰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