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5주기에 민간인 희생자 '무죄'… "태어나기 전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 불러봤으면"

입력
2023.10.19 18:12
재판부 "죄형법정주의 위배", 4번째 재심 무죄 판결

여순 10ㆍ19사건 제75주기를 맞은 19일, 당시 학살 당한 민간인 희생자 4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형사1부(재판장 허정훈)는 이날 여순사건으로 처형된 고 박채영, 심재동, 박창래, 이성의씨 4명의 민간인 희생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과거사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서에 기재된 내용에 의하면 여순사건 당시 군경에 의한 민간인들에 대한 체포ㆍ감금이 일정한 심사나 조사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졌고 그 후 조사 과정에서 비인도적인 고문이 자행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또 희생자들에게 적용됐던 포고령 제2호에 대해서도 “적용 범위가 넓고 포괄적이어서 통상의 판단 능력을 갖춘 국민이 법률에 따라 금지된 행위가 무엇인지 예견하기 어려워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돼 위헌ㆍ무효”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법정에 나온 유족들에게 “심적으로 많이 고생하신 것으로 안다. 무죄가 선고됐으니 그간의 원한을 푸셨으면 한다”며 “형사보상 등을 신속하게 신청해 주시면 절차에 따라 조치하겠다”고 당부했다

‘무죄’ 선고에 엄숙했던 법정 안에선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 박채영씨의 딸 수희(82)씨는 “일곱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리움 때문에 잠도 못 자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며 “75년 만에 무죄를 선고 받아 다행”이라고 기뻐했다. 고 심재동씨의 손자 규환(54)씨도 “할아버지 시신을 찾지 못해 빈 목관을 넣어 묘지를 조성해 모시고 있다”며 “뼈 한조각이라도 찾아 돌아가신 할머니 옆에 묻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고 이성의씨 딸 정순(75)씨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끌려가 숨지면서 유복자로 태어났다”며 “아빠를 불러 보지도 못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면서 “아버지 명예가 회복돼 감개무량하다. 지금 이 순간 아버지가 너무 보고싶다”고 했다.

박씨 등은 여순사건 당시 14연대 군인 등에 동조해 공중 치안과 통치 질서를 교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영장도 없이 체포ㆍ수감됐다가 처형당했다.

이번 재판은 2019년 대법원이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한 뒤 내려진 4번째 무죄 판결이다. 2020년 1월 철도기관사이던 고 장환봉씨에 이어 2021년 6월 순천역 철도원으로 근무했던 김영기씨와 대전형무소에서 숨진 농민 김운경씨 등 민간인 희생자 9명에 대해 무죄가 내려졌다. 이어 지난해 1월 28일 여순사건 당시 대전시 산내동 골령골에서 희생된 당시 20세 김중호씨 등 12명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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