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두뇌 서바이벌은 두터운 마니아층은 있어도 대중적으로는 사랑받기 어려운 콘텐츠로 여겨졌다. 몸이 아닌 두뇌를 쓰는 미션의 룰이 복잡해서다. 하지만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데블스 플랜'은 달랐다. 공개 후 국내에서 TV쇼 부문 1위를 질주한 것은 물론, 공개 첫 주 만에 글로벌 톱 10 TV쇼(비영어) 부문 3위에 올랐다. "전작('더 지니어스 게임', '대탈출' 등)에서의 아쉬움을 중간 정도는 보완한 것 같다"는 정종연 PD도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을 '외연 확장'으로 꼽았다.
'데블스 플랜'은 정 PD의 전작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우선, 매회차 무조건 탈락자를 만드는 데스매치가 없다. 이런 점을 이용해 유튜버 궤도(김재혁)는 능력이 없는 참가자들도 살아남도록 돕는다. 궤도의 '공리주의'는 서바이벌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다. 궤도와 대척점에 선 최종 우승자 하석진은 "다 그냥 들러붙어서 (점수를) 딴 거지. 이게 무슨 데블스 플랜이야? '빌붙어 플랜'(약자가 강자에게 빌붙어서 생존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지"라며 격앙된 반응까지 보인다. "함께 살자"는 철학은 서바이벌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정 PD는 "궤도가 게임의 목표를 인류애적인 비경쟁적 요소로 두리라는 것도, 그리고 그게 게임 판도를 바꾸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외의 성과도 있었다. 호불호는 갈리지만 '공리주의 vs 능력주의'는 프로그램의 한 축이 돼 시청자들이 '과몰입'하게 되는 포인트가 됐다. 초반엔 의외로 활약이 미진했던 하석진이 각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석진은 지난 16일 라운드 인터뷰에서 "(공리주의자인) 다수 연합 때문에 개인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무력감이 들었다"면서 "같은 연합이던 김동재가 탈락하면서, 장거리 달리기로 치면 중위권에서 존재감 없이 뛰던 선수가 갑자기 스위치가 켜졌다"고 돌아봤다.
'데블스 플랜'은 서바이벌을 단순히 생존게임이 아닌 플레이어 성장의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라도 쓰는 출연자의 행동을 부각하기보다는 '무엇이 이 선택을 만들었나'에 집중한다는 분석이다. 앞서 '더 지니어스 게임' 등에선 일부 참가자들이 승리만을 위한 과도한 '친목질'(편 가르기)로 악성 댓글이 쏟아지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반면 '데블스 플랜'엔 편 가르기를 조장하는 이른바 빌런이 없다. 정 PD는 "성장과 변화가 두뇌 서바이벌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밖에도 '데블스 플랜'에서는 게임의 참신성과 공정성 시비, 스포일러 등장 등 과거 일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발생했던 논란이 일지 않았다. 올해 공개된 다른 서바이벌('피의 게임2', '더 타임 호텔' 등)이 기대만큼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가운데 '데블스 플랜'의 성공은 돋보인다. 흥행을 보장하기 힘든 두뇌 서바이벌이지만 미래는 밝다. 하석진은 "20년 가까운 방송 생활 중 이토록 살아 있는 콘텐츠는 처음"이라면서 "각자 이입할 대상을 만들게 하고 전개에 따라 시청자들이 (플레이어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 PD는 "누구나 있는 마음속 지적 허영심을 자극할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