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같은 성, 시간이 멎은 골목... 좀 더 일본다운 복고 감성 '몽글몽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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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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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히메현 마쓰야마와 오즈

일본의 이름난 관광지엔 한국인이 현지인보다 많다는 여행 후기가 심심찮게 보인다. 코로나19 제한이 풀린 이후 일본은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해외 여행지다. 그래서 좀 더 일본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이들은 대도시 유명 관광지보다 지역 소도시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에히메현 마쓰야마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알 듯 말 듯한 지명이다. 에히메현은 일본열도 4개 주요 섬 중 면적이 가장 작은 시코쿠 서북부에 위치한다. 경상북도와 비슷한 크기의 시코쿠에는 에히메를 비롯해 도쿠시마, 가가와, 고치 4개 현이 있다. 마쓰야마는 에히메 현청 소재지이자 중심 도시다.


언덕 위의 구름, 마쓰야마성

언덕 위의 구름, 뭔가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이 그려진다. 마쓰야마 중심부 에히메 현청 부근에 ‘언덕 위의 구름’ 박물관이 있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1923~1996)가 1968년 4월 22일부터 1972년 8월 4일까지 산케이신문에 연재한 동명의 소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박물관이다.

건물은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막힌 듯한 노출 콘크리트 통로를 따라 이동하며 소설 속 시대상과 주인공의 생애 등을 전시하고 있다. 관람 동선이 소설 제목처럼 완만하게 언덕을 오르듯 설계됐다.


‘언덕 위의 구름’ 주인공은 시코쿠 출신의 하이쿠(5·7·5의 3구 17자로 된 일본 특유의 단시) 시인 마사오카 시키, 쓰시마해전 전략기술을 수립한 해군 장교 아키야마 사네유키, 그의 형이자 일본육군 기병부대 창시자 아키야마 요시후루다. 모두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 시기에 태어났다. 시바는 이 소설로 일본의 ‘국민작가’ 반열에 올랐다.

“시바는 ‘언덕 위의 구름’에서 유신으로 탄생한 ‘일본국’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본 국민’의 탄생 과정을 그렸다. 여기서 ‘일본 국민’은 러일전쟁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본국’을 강하게 만들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에 전혀 의심하지 않고 나아가던 낙천주의자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들의 삶은 1945년 패전 이후 ‘언덕 위의 구름’을 바라보면서 필사적으로 다시 언덕을 오르던 고도성장기의 ‘일본 국민’이 본받아야 할 삶의 자세로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중 박삼헌의 마쓰야마 편). 1904년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다. 몽글몽글한 이름과 달리 한국인으로서는 다소 떨떠름한 박물관이다.


박물관 바로 옆에 ‘도련님(봇짱)’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익숙한 또 다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 유적이 있다. 1895년 마쓰야마중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했을 당시 묵었던 하숙집 자리인데, 지금은 ‘아이쇼테이’라는 카페가 영업 중이다. 소설 ‘봇짱’의 무대임을 알려주는 ‘봇짱열차’는 증기기관차를 디젤로 바꿔 지금도 관광객을 태우고 마쓰야마 시내를 누빈다.

카페 옆 유럽의 성처럼 우아한 건물 한 채가 눈길을 잡는다. 반스이소(萬翠莊)라는 이름의 건물은 옛 마쓰야마 번주의 별장으로 1900년 초 건축 당시에는 상류층의 사교의 장으로, 지금은 이벤트나 전시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서부터 지붕 위 첨탑으로 향하는데, 그 위에 바로 이 도시의 상징 마쓰야마성이 자리 잡고 있다.

마쓰야마성은 에도시대 이전에 지어진 덴슈가쿠(천수각)가 남아 있는 12개 성 중 하나로 1627년 가토 요시아키 영주가 착공 25년 만에 완공했다. 1784년 낙뢰로 천수각이 소실됐지만 재정난으로 바로 복구하지 못하고 1854년에야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됐다.




성곽까지 산책로가 연결되지만 여행객은 주로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성곽 동편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상부까지 로프웨이(케이블카)를 이용하면 3분, 리프트를 타면 6분가량 걸린다. 리프트는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1명씩 타고 이동한다. 앞뒤로 흔들거릴 때마다 살짝 스릴이 느껴진다.

상부 정류장에 내리면 본격적으로 성곽 투어가 시작된다. 모서리가 부챗살 모양으로 안으로 살짝 휘어지게 쌓은 높은 석벽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입구에서 중심부인 천수각까지는 지그재그로 몇 번이나 휘어지며 여러 개의 성문을 통과해야 한다. 천수각 안의 동선도 미로처럼 막혔다 연결되기를 반복한다. 지하 1층, 지상 3층 구조의 중심 망루에 닿으려면 건물 내부에서 좁은 계단을 몇 차례나 오르내린다.





드디어 가장 꼭대기 망루에 오르면 남쪽으로 마쓰야마 시내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넓은 평지 뒤로 이시즈치산(1,982m)을 중심으로 길게 연결된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 있다. 희미한 산줄기 위로 뭉게구름이 걸려 있다. 시바 료타로도 분명 이 풍경에서 ‘언덕 위의 구름’을 연상했으리라. 망루 서쪽으로는 낮은 도심 건물 뒤로 혼슈와 시코쿠 사이 세토내해가 아스라히 조망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티브, 도고온천

도고온천은 이 도시가 마쓰야마성만큼 자랑스럽게 여기는 관광지다. 3,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다는 온천은 8세기에 편찬된 일본의 가장 오래된 단가집 ‘만요슈(萬葉集)’에 실려 있고,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에도 등장한다.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브가 된 건물이기도 하다. 미로처럼 얽힌 건물 내부는 인간의 하소연을 들어주느라 지친 800여 신들이 밤마다 피로를 푸는 장소로 그려진다. 현재의 도고온천 본관 건물은 1894년 당시 촌장이 출자자를 모집해 지었다고 한다. 투자자에게 평생 이용권과 자손에게 양도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지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각각 구조가 다른 7개의 건물을 하나로 결합한 독특한 외관이 눈길을 잡는다. 내부는 복도와 계단의 위치가 상이하고, 정면과 뒤쪽 입구의 높이가 다르다. 기와지붕을 내부에 사용한 것도 특이하고, 뜨거운 온천수와 김이 건물을 상하지 않게 설계한 것도 독특한 점으로 평가된다.

현재 본관은 정면 일부를 제외하면 전부 가림막으로 덮여 있다. 내년 말까지 보존 수리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다. 그럼에도 흉물스럽지 않은 건 가림막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지역 화가 오타케 노부오가 ‘열, 빛 그리고 사람과 거리가 만들어 내는 에너지’라는 테마로 그린 그림을 25배로 확대 인쇄한 작품이다. 외부는 공사 중이지만 영업은 계속된다. ‘신의 온천 입욕’과 2층 대청방 휴식을 포함한 입장료는 840엔이다.


실상은 온천 이용객보다 건물을 보러 온 관광객이 더 많다. 도고온천 전철역은 근대의 외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스타벅스 커피가 입점해 있다. 바로 옆에 봇짱열차 종점이 있고, 광장에 발을 담글 수 있는 조그만 노천탕도 있다. 온천 본관으로 가자면 제법 큰 규모의 상가를 통과해야 한다. 각종 기념품과 간식거리를 팔고 있다.

온천 주변 낮은 언덕으로 산책로가 이어진다. 도고온천을 지키는 신을 모신 유진자(湯神社)에 오르면 본관 건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도 작은 규모의 노천 족욕시설이 조성돼 있다. 에히메현은 한적하게 일본의 온천문화를 맛보기 좋은 곳으로, 도고온천에서 약 40분 떨어진 니부카와온천 미카도(鈍川温泉 美賀登)를 추천한다. 여관에 투숙하지 않고 낮 시간에 점심과 온천이 포함된 체험상품을 이용할 수 있다. 3~4명이 들어갈 수 있는 아담한 온천탕은 물소리 청량한 계곡과 접해 있다.



마법사를 만날까, 에히메의 소도시 ‘오즈’

마쓰야마 남서부 오즈시는 일본 소도시의 정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요(에히메의 옛 지명)의 작은 교토'라 불리는 곳으로 동화 ‘오즈의 마법사’처럼 근대 일본의 어느 시간에 떨어진 것같이 고풍스럽다. 오즈시 홍보물에는 아담한 오즈성과 거상의 별장이자 일본 전통 정원인 가류(臥龍)산장을 대표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한국 여행객에게는 복고 감성이 물씬 풍기는 오즈의 골목이 훨씬 매력적일 듯하다. 일직선으로 구획된 조카마치(성시) 골목 양쪽으로 2층의 목조주택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사이사이에 조그만 가게와 카페, 살림집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마을 호텔도 여럿 보인다.

강을 따라 길쭉하게 생긴 마을은 그리 넓지 않아 한두 시간이면 두루 둘러볼 수 있다. 상가와 주택이 이어지는 골목, 오래된 흙벽이 남아 있는 메이지시대 주택, 1901년 영국식으로 쌓고 일본식 기와를 얹은 ‘붉은 벽돌관’ 등 발길이 닿는 곳마다 소박한 소도시의 감성이 묻어난다. 마쓰야마역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열차를 타면 약 35분 만에 이요오즈역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오즈성까지는 버스로 10분 정도 걸린다.


이요오즈역에서 기차로 45분 거리의 시모나다역은 일본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여행객과 철도 애호가를 불러들이고 있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고, 기차여행을 부르는 포스터에 쓰이기도 했다. 작은 역사를 통과하면 낡은 지붕의 플랫폼에 벤치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여행객은 이곳에서 바다를 응시하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특히 해질 무렵 검푸른 바다 위로 물드는 노을 풍경이 일품이다. 한국의 정동진역에 비유할 만한데, 호젓한 시골역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은 큰 차이다.

마쓰야마=글·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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