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직 사법부 수장을 구속해 재판에 넘긴 검찰이 4년 7개월 동안 이어진 '사법농단' 의혹 1심 재판을 마무리하며 재판부에 중형 선고를 요청했다. 검찰은 "법관이 법을 파괴한 심각한 사건"으로 규정하며 전직 대법원장과 전직 대법관들을 비판했고, '농단의 주범'으로 지목된 전직 고위 법관들은 "검찰이 가짜 시나리오로 사법부 전체에 치욕을 줬다"고 맞섰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부장 이종민 임정택 민소영)는 15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를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의 결심 공판을 열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징역 7년, 박 전 대법관에게 징역 5년, 고 전 대법관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1년 9월부터 임기 6년간 대법원 위상 강화 등의 목적을 위해 주요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하거나 비판적인 법관에게 불이익을 지시했다는 등의 혐의로 2019년 2월 구속기소됐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크게 △대법원 위상 강화와 이익 도모를 위한 재판 거래 △대내외적 비판 세력 탄압 △판사 비위 은폐 등 부당한 조직 보호로 나뉘고, 구체적 공소사실만 47개에 달했다. 검찰은 박 전 대법관과 고 전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장으로서 일부 범행을 양 전 대법원장에게 보고하거나 지시받은 것으로 판단하고 공범으로 기소했다.
이날 검찰은 재판 거래의 대상으로 지목된 △강제징용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사건 등을 거론하며 "상고법원 설치 등 사법부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특정 판결을 요구 내지 유도함으로써 재판 독립의 환경을 파괴했다"고 강조했다. 또 "사법행정권 남용 범행은 개별 법관의 일탈이 아니라,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특정 목표 달성을 위해 수행한 직무상 범행"이라고 못 박았다.
공판 과정 내내 침묵을 지키던 양 전 대법원장과 두 전직 대법관은 이날 직접 발언권을 얻어 검찰 수사, 문재인 전 대통령, 김명수 대법원장을 겨냥한 비판을 쏟아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정치권력 광풍이 사법부를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사건 초기 분위기가 잊히지 않는다"며 "당시 법원의 날 행사에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해 '사법농단' '재판거래' 운운했는데, 결국 집권 권력으로 사법부의 미래를 장악하기 위해 사법부의 과거를 지배하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불법적 수사권 남용과 반강제적 추측 진술로 검사는 한 편의 소설을 썼다"며 "우리 역사에서 사법부를 상대로 한 이처럼 노골적이고 대규모적이고 끔찍한 공격은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전 대법관은 "대통령이 사법부 안뜰에 와서 의혹 규명을 주문했고, 대법원장이 협조하겠다고 손뼉을 쳤다"며 "블랙리스트가 있든 없든 많은 이들에겐 이미 법원을 제멋대로 희롱한 사건으로 각인됐고, 수사 기록에서 법관들의 울분과 분노가 묻어나는 진술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이 재판은 우리 사법이 그런 사법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혀줄 역사적 책임이 있다"며 "오로지 형사법과 증거에 의해서만 판단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방대한 사건 기록을 감안해 선고 기일을 약 3개월 후인 12월 22일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