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태국 총선에서 국민들 다수는 변화를 꿈꾸며 야권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하원 최다 의석을 차지한 전진당은 정권을 잡지 못했다. 유력 차기 총리 후보였던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가 7월 총리 선출 투표에서 군부에 장악된 상·하원의 어깃장으로 낙마했기 때문이다. 왕실모독죄 폐지를 비롯해 군부 개혁 등 파격 공약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민심은 들끓었다. 두 달간 태국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났다. 시민들은 “내 표를 존중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들의 분노와 관계없이 이달 22일 의회 투표에서 하원 2당이자 군부와 손잡은 푸어타이당의 스레타 타위신 후보가 총리로 선출됐다. 연정은 새 내각 구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변화를 바라는 시민들의 꿈은 꺾이지 않았다. 시위를 이끌어 온 학생단체 ‘탐마삿 시위연합전선(UFTD)’은 한국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 개혁 목소리도, 군주제 개혁 바람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태국 민주화의 성지인 탐마삿대 소속 학생들이 주축인 UFTD는 2020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답변은 안젤로 벨루티 UFTD 학술 책임자가 대표로 작성했다. 인터뷰는 의회 투표 이전인 지난 17일 진행됐고, 총리 선출 이후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내용이 추가됐다.
“’정치적 광기’를 통해 태국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이번 총리 선출 결과에 대한 UFTD의 평가다. 이들은 “푸어타이당에 극도로 실망했다”며 “’정치에는 진정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은 국민을 배반하려 스스로를 속이는 수사일 뿐”이라고도 잘라 말했다. 푸어타이당이 권력을 잡기 위해 전진당의 손을 놓아 버리고 20년 앙숙인 군부와 한 배를 탄 점을 꼬집은 것이다. 총선 전에는 “쿠데타 세력과 연대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입장을 뒤집은 푸어타이당을 겨냥해 “국민 대표의 기본은 주권을 가진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며 분노를 감추지 않기도 했다.
그렇다고 UFTD가 스레타 신임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전진당이 푸어타이당에 정부 구성 권한을 공식적으로 넘기는 등 새 정부의 절차적 정당성엔 문제가 없는 탓이다. 다만 민주화를 향한 발걸음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안젤로는 강조했다. “총리 임명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국민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는 것마저 멈춰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태국 민주화를 꿈꾸는 시민들의 향후 투쟁 초점은 ①비민주적 총리 선출 규정 폐지 ②왕실모독죄 폐지, 이렇게 두 가지다.
피타 대표가 의회 투표에서 낙마한 것은 군부가 2017년 개정한 헌법 영향이 컸다. 이에 따르면 총리가 되기 위해선 양원제(상원 250석·하원 500석) 의회에서 절반(375명)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군부가 장악한 상원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누구도 총리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UFTD는 “현재의 정치 형태가 개혁되지 않으면 선거를 통해 국민이 뽑은 대표자가 향후 의회에서 (총리로) 부결되는 상황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태국 민주화를 위해 바뀌어야 할 1순위”라고 강조했다.
‘금기’나 다름없는 왕실모독죄를 없애기 위해서도 지속적으로 싸울 예정이다. 2020~2023년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왕실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전진당이 내걸었던 군주제 개혁 공약은 새 정부가 들어서며 흐지부지됐으나,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 관심을 환기시키겠다는 게 UFTD의 다짐이다.
안젤로는 “총선에서 전진당이 최다 득표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엔 군주제와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젊은 층의 염증이 있었다”며 “어려운 길이지만 태국은 조금씩 변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국제사회도 관심을 갖고 힘을 보태 달라”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