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일본 정부는 '본인의 의사에 반한 위안부의 피해 사실 확인과 가해국으로서의 일본의 재발 방지 노력'을 내용으로 하는 '고노담화'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일본군위안부 논의는 얼마나 나아갔을까. 매해 8월 14일로 지정된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지난 11일 동북아역사재단이 서울 서대문구 재단 대회의실에서 '내셔널리즘과 성 동원, 그 연속과 단절'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독일, 미국의 연구자들도 참석한 이번 학술회의가 무엇보다 주목한 지점은 '국가의 성 관리 체제'였다. 일본의 극우세력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부정론자들은 근대 이후 일본에서 시행된 '공창제'(19세기 후반부터 1945년까지 근대 일본의 성 관리 정책)를 들어 일본군위안부 역시 공창제의 일종으로, 피해자들을 매춘부로 폄하하고 전쟁 성범죄를 자발적인 성매매로 왜곡해 왔다. 이는 일본군위안부가 '자발이냐 강제냐'라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자발성과 강제성을 따지는 데 갇히면서, 논의는 국가 혹은 제국주의가 동원하고 관리한 여성의 신체와 성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외면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19세기 후반 일본은 대륙으로 '가라유키상'이라 통칭되는 여성을 보내 성매매를 하도록 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렸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신문에 "인민의 해외 이식을 장려할 때 특히 창부 외출의 필요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며 일본의 세력 확장을 위해 성매매를 허가하는 인식을 보일 정도였다. 오차노미즈대 젠더연구소의 다케모토 니나는 이 같은 인식이 이후 위안부 제도로 이어졌다고 봤다. 나고야대학 젠더다이버시티연구소의 하야시 요코는 "일본의 근대 공창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미 국가로부터의 압력과 명령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일본 스스로 독자적으로 결정한다는 의식이 희박했다"며 "이 같은 태도가 전시 일본군위안부 고안과 시행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공창제가 시행됐다. 일본과 조선의 공창제를 비교하여 성 관리 정책에 반영된 식민주의를 분석한 동북아역사재단의 박정애 연구위원은 "식민지 가부장제와 사회경제적 차별구조 안에 놓였던 조선 여성이 위안부가 되는 과정은 식민주의 폭력구조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특수성은 제국 일본의 성 관리 체제에서 형성된 인신매매 메커니즘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면서, 공창제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제대로 하는 것에서부터 생산적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봤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군인도 점령지에서 여성에 대해 성 착취를 했다. 함부르크 학술문화지원재단의 레기나 뮐호이저는 "일본군과 독일군은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관리하기 위해 통제된 매춘을 해결책으로 본 것'이 공통적"이라면서도 "독일과 달리 일본은 식민지 권력 구조에 기초한 '여성들의 인신매매'에 크게 의존한 것이 차이"라고 꼬집었다. 오사카대의 후지메 유키는 "공창제도와 위안부의 연관성은 뚜렷하며, 일본군 위안소는 1930년대 이후 전쟁 속에서 군, 내무성, 외무성이 연계하여 설립한 것이며, 따라서 정의상 공창제도에 다름없다"라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 국가가 사죄와 배상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