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세대만 해도 영화의 정의가 협소했습니다. 모두가 창작자가 된 지금 영상은 보편적인 새로운 언어가 됐어요.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는지, 영화란 과연 무엇인지 이젠 알 수 없습니다.”
태국의 영화 거장 아피찻퐁 위라세타쿨(53) 감독이 지난 20일 개막한 제20회 서울국제실험영화 페스티벌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는 25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국현) 서울관에서 기자들을 만나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피찻퐁 감독은 ‘엉클 분미’(2010)로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열대병’(2004)과 ‘메모리아’(2021)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두 차례 받은 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다. 주로 신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전위적인 화법으로 서술해 주목받아왔다. 올해 서울실험영화 페스티벌에서는 그의 중ㆍ단편 실험영화 29편이 상영된다. 9월 3일까지 국현 서울관에서다.
아피찻퐁 감독은 중ㆍ단편 실험영화로 미술계 주목을 받아오기도 했다. 영화관과 미술관 사이 경계에 서 있는 예술가라 할 수 있다. 그는 “(20대 시절) 시카고예술대학(SAIC)에서 공부할 때부터 실험영화를 만들었는데, 덜 알려졌다”며 “실험영화를 하며 기존 서사에 반하는 사고를 하게 됐고, 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험영화뿐 아니라 극장에서 상영되는 장편영화까지 아피찻퐁 영화는 난해하고 속도가 느리다는 평가가 따른다. 아피찻퐁은 ‘대중성을 고려할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오만하게 보일지 몰라도 저는 관객을 생각하거나 의식한 적이 없다”며 “영화로 누군가를 즐겁게 만족시켜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영화의 속도감은 “촬영 당시 제가 느끼는 감정에 맞춘다”고 밝히기도 했다. “저는 결과물이 나빠도 만드는 과정이 더 즐거우면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피찻퐁의 영화들은 자연광을 중시하고,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집중한다. 주인공이라 여겨지는 인물보다 주변부를 주시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화면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영화에서 주요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이야기 전개 방식도, 촬영과 편집 방식도 기존관념을 따르지 않는다. 아피찻퐁 감독은 “공원에 두 친구가 같이 있어도 각자 보는 것이 다르고 느낌도 다르기 마련”이라며 “저는 영화의 개방성을 활용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프레임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영화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할 수 없다”며 “영화는 (태생적으로)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태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주요 예술가 중 한 명인 아피찻퐁 감독은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 묻자 “제가 산속에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이라며 웃었다. 그는 “(아시아적 가치가 무엇이든) 미얀마에서처럼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아시아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밝혔다. “미국과 중국이 자꾸 예전 제국처럼 느껴지고 (아시아에서) 국가주의가 요즘 너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