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범에게 속아 계좌개설에 필요한 정보를 건넨 피해자까지 ‘기소유예’ 처분한 것은 부당하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범죄 수익을 기대한 정황이 없는 이상, 관련 형사처분 자체를 취소하는 것이 옳다는 취지다.
헌재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A씨가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낸 헌법소원 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인용 결정을 내렸다고 9일 밝혔다.
A씨는 2021년 “투자금을 주면 고수익으로 돌려주겠다”는 보이스피싱 일당의 제안을 받고 총 1,100만 원을 송금했다. 그는 이후 “수익금 출금을 위해 개인정보가 필요하다”는 일당의 요청에 계좌개설용 인증번호와 신분증, 신용카드 번호 등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투자금을 돌려주는 대신 A씨 정보로 신규 계좌를 개설해 또 다른 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했다.
수사에 나선 검찰은 A씨가 범죄 수익 기대를 갖고 개인정보를 건넸다고 봤다. 다만 검찰은 피해 정황 등을 참작해 같은 해 7월 그를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하며 사건을 종결했다. 기소유예는 혐의는 인정하되, 사정을 참작해 피의자를 재판에는 넘기지 않는 처분이다.
A씨는 검찰 측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로 송금한 돈을 출금하기 위해 인증번호 등을 보낸 것이지 (범죄에 사용된) 계좌개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대가 관계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A씨 주장을 수용했다. 헌재는 “A씨는 계좌개설 이야기를 전혀 들은 사실이 없고, 단지 투자금을 출금하려 본인인증 수단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며 “자의적 검찰권 행사로 청구인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이 침해됐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