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성향 미국 대사 못 보내”… ‘동맥경화’에 빠진 미국 행정부 인사

입력
2023.07.0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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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상원서 '무작정 반대' 전술
미국 대사 ‘공석’... 군 승진도 멈춰
"중동 등서 외교안보 공백 우려돼"

한때 ‘세계의 경찰’을 자처했던 미국이 아랍에미리트(UAE)와 이집트, 아프리카연합 등 수십 개국의 대사 자리를 계속 비워두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후보자를 무작정 반대하는 상원, 정확히는 공화당의 지연 전술 탓이다. 군 고위직 등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미 행정부 인사가 꽉 막혀 버린 ‘동맥경화’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3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공화당의 발목 잡기로 각국 대사 임명 절차가 늦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제이디 밴스(공화) 상원의원이 아프리카연합 주재 미국 대사로 지명된 스테파니 설리번에 대해 ‘워우크(WOKE·깨어 있음) 인물’이라며 인준 절차를 반대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워우크’는 미국 사회에서 젠더, 인종, 성소수자 등 문제에 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상태를 뜻하는 용어지만, 공화당 등 우파 진영에선 '진보 정체성 강요’라는 조롱의 의미로 쓴다. 밴스 의원은 설리번 지명자가 성소수자 등에 포용적이라면서 “‘진보적 사회 정책’은 미국 대표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상원 외교위에서 인준 절차를 기다리는 직업 외교관은 총 26명에 달한다.

낯선 풍경은 아니다. 대사 인준 절차가 보통 수개월 걸리는 데다, 의회의 고위직 인준 지연은 특정 사안에 대한 정부와의 힘겨루기 차원에서도 벌어진다. 그러나 최근 상원에선 ‘덮어놓고 반대(Blanket Hold)’ 관행이 지나치게 잦아졌다고 외교전문 매체 포린폴리시도 지난달 꼬집었다. 특히 지명자와는 아예 무관한 문제를 걸고넘어지는 사례마저 많아졌다. 랜드 폴(공화) 상원의원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원 관련 문서를 공개할 때까지 외교위 인준이 필요한 모든 후보자 표결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50명에 달하는 군 인사도 국방부의 임신중단 지원 정책 폐기를 요구하는 군사위원회 소속 토미 튜버빌(공화) 상원의원 때문에 멈춰 섰다. 인도·태평양에서 미 해군을 지휘하는 7함대 사령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군사위원회 미국 대표 등이 현재 공석이다. 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기소에 항의하는 의미로 바이든 대통령이 지명한 법무부 당국자 인준도 보류됐다. 민주당 소속이지만 앞서 바이든 행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제동을 건 조 맨친 상원의원도 환경보호청의 ‘급진적인’ 기후변화 규제를 막겠다면서 관련 인사를 저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인준 절차 지연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비영리단체 ‘공공서비스 파트너십(PPS)‘에 따르면 대통령이 지명한 인사의 상원 인준에 걸리는 시간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 평균 56.4일이었던 반면, 트럼프 행정부에선 두 배인 115일로 늘었다. 바이든 행정부에선 127일로 치솟았다.

그 결과 불가피해진 미국의 외교·안보 공백에 대한 우려 목소리도 크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 무대가 된 중동, 러시아 민간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이 진출해 있는 아프리카 등에서 미국 대사가 공석 상태인 건 문제라고 WSJ는 지적했다. 국방부도 연말까지 관련 절차가 지연되면 각군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포함, 약 650명의 장성 인사가 악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포린폴리시는 “수십 개의 국가안보 고위직이 미국 외교정책의 위험한 시대에 텅 비어 있게 됐다”고 짚었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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