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거부권→재의결'로 법안 폐기할 때 대안도 함께 마련... 브레이크 없는 '거부권 정국'

입력
2023.06.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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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후 '거부권 행사 후 부결' 6건
대부분 여야 합의안 마련 후 본회의 올려
현재는 '거대야당 폭주' '입법 독재'로 대치
법안 통과보다 힘겨루기 치중 '오기정치'만

지난달 30일 간호법 제정안 재의결이 부결로 끝나면서 거대 야당이 법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이른바 '거부권 정국'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 국면에서 여야 어느 쪽에 더 책임이 있다고 단정 짓긴 어렵지만, '거부권-재의결' 양상이 과거 대통령 거부권 행사 때와 다르다는 건 분명하다. 과거에는 국회가 재의결에 나서더라도 그 사이 여야가 합의해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내는 운영의 묘가 있었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 이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사례는 총 66회다. 이 중 이승만(45회), 박정희(5회)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현재의 헌법 체계가 갖춰진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행사된 거부권은 16차례다.

이 가운데 현 정부처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후 국회가 재투표에 나선 것이 부결돼 폐기된 법안은 총 6건(노태우 정부 4건, 노무현 정부 2건)이다. 하지만 거부권 행사 후 곧바로 국회가 재의결에 나선 지금과는 양상이 달랐다. 6건 중 ‘대북송금 새 특검법’을 제외한 5개 법안은 모두 기존 법안 부결처리와 함께 새로운 합의안 처리가 이뤄졌다.

대표적인 법안이 노태우 정부 당시 지방자치법 개정안이다. 국회는 1989년 3월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처리했는데, 같은 달 노 대통령은 ‘우선 지방의회를 구성한 뒤 지자체장을 선출해야 시행착오를 줄이고 지방자치제 취지를 정착시킬 수 있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후 이 법안이 다시 본회의에 오른 것은 9개월이 지난 12월이었다. 국회는 4당 합의를 거쳐 지방의회 선거를 먼저 한 뒤 지자체장 선거를 시작한다는 대안을 만들어냈고, 기존 법안 폐기와 동시에 새 법안을 처리했다.

마찬가지로 노태우 정부에서 처리된 해직공직자의 복직 및 보상에 관한 특별조치법도 대통령의 재의 요구(1988년 12월) 이후 3개월간 대안을 마련한 뒤 재의결에 나섰다. 노무현 정부에서 처리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안(2007년)도 마찬가지로 기존 법안은 재의결을 통해 폐기한 뒤, 적용 대상자 범위, 지원 규모 등을 조정해 같은 날 본회의에 올린 대안을 처리했다.

반면 윤석열 정부에서의 거부권 행사는 당시와는 다르게 ‘강대강’ 대치만 표면화되고 있다. 그 결과 타협과 절충을 통한 수정안 도출이 전무한 상태에서 결론이 뻔한 표대결만 반복되고 있다. 내년 총선 프레임으로 국민의힘은 '야당의 입법독재', 민주당은 '대통령의 행정독재'를 내걸기 위한 명분 쌓기 성격이 강하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정부는 양곡관리법 거부권을 행사한 뒤 벼 재배면적 감축, 농업직불금 예산 확대 등의 대안을 내놓았지만, 민주당은 “멀쩡한 법안은 내팽개치고 땜질 처방만 내놓았다”(박홍근 당시 원내대표)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폐기 이후 민주당이 새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발의되지는 않았다. 간호법도 마찬가지로 대통령 거부권 행사 이후에도 여야가 합의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다시 본회의에 올린 뒤 폐기 수순을 밟았다.

거부권 정국은 6월 국회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직회부 절차를 거친 방송법이 본회의 표결을 기다리고 있고, 노란봉투법도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본회의 직회부를 결정했다. 두 법안의 처리 과정 모두 앞서 거부권 대상이 된 양곡관리법, 간호법과 같은 경로다. 양극화된 정치의 현 주소로 과거보다 여야의 정치력이 후퇴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의석만 믿고 일방적으로 법안을 밀어붙이는 야당과, 국회 의결을 무시하는 대통령이 부딪히는 ‘오기의 정치’가 반복되고 있다”며 “필요한 법안 통과를 위해 양보를 하기 보다는 지지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힘 자랑에만 나서면 결국 국민만 피해를 보게 된다”고 지적했다.


박세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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