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부에서 부총리와 장관을 지낸 경제 원로들이 연초 세수 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는 현 정부의 재정 긴축 기조에 힘을 실어 줬다. 포퓰리즘(대중영합)에 매몰돼 재정건전성을 도외시하고 있다고 정치권을 꾸짖으면서다.
25일 서울 여의도에서 ‘한국경제의 오늘과 내일’을 주제로 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함께 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60주년 기념 국제 콘퍼런스’에는 전직 부총리와 경제부처 장관 30여 명이 회동했다. 행사를 빛내고, 조언도 좀 해 달라는 주최 측 부탁에 응해서다.
대체로 현 정부의 방향성과 비슷한 주문이 많았다. 한때 나라 곳간을 책임졌던 인사들답게 우선 관심사 중 하나가 재정이었고, 재정 낭비가 금물이라는 인식에는 몸담았던 정부의 좌우가 없었다. 기재부에 따르면, 장병완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이날 오찬 자리에서 “저출산ㆍ고령화, 공적연금 부실 선제 대응 등을 위해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며 “‘건전 재정’ 기조 확립을 위해 ‘재정준칙’ 법제화가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홍남기 전 부총리는 기재부ㆍKDI가 행사를 앞두고 미리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국의 경우 절대적 국가 채무 수준은 낮지만 다른 선진국보다 증가 속도가 매우 빠른 게 문제”라며 “복지제도 성숙, 통일 대비 재정 여력 확충 등 재정 소요 증가 가능성을 고려해 재정 역량을 키우기 위한 재정준칙 법제화가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제 원로들이 지목하는 건전 재정의 최대 장애물은 정치권이다. 행사장에서 기자들과 만난 진념 전 부총리는 “건전 재정 원칙에 대한 합의는 제쳐 둔 채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대상 기준을 1,000억 원으로 올리는 데에만 여야 의원들이 박수치고 합의하고, 그게 정치냐”고 반문했다. 오래된 현행 예타 기준(500억 원)을 상향하되 재정준칙 법제화를 병행해 선심성 지역 사업 난립을 통제한다는 게 지난해 9월 정부가 내놓은 구상이었다.
장 전 장관도 언론에 “재정 정책에 있어 포퓰리즘에 입각한 정책, 재정은 마르지 않는 샘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주장들이 정치권 일각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다”며 “국민의 눈을 속이는 정책”이라고 일갈했다. 공교롭게 세 사람은 전통적으로 진보를 표방해 왔고 지금 야당인 민주당 계열 정부에서 경제부처를 이끌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은 재정준칙이 당장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역대 부총리와 장관 다수가 꼽은 한국 경제의 장기 과제는 규제ㆍ구조 개혁이었다. 전윤철 전 부총리는 오찬에서 “현시점에서 정부는 시장 관리ㆍ감시 기능을 강화하고 규제 기능은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며 “공공 부문의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최경환 전 부총리는 “일본처럼 ‘축소 균형’ 상태가 되지 않으려면 구조개혁이 필수”라고 했다. 성향이 다른 김대중, 박근혜 정부 때 각각 기용된 두 부총리 출신 인사가 한목소리로 개혁을 주문한 것이다. 다만 개혁이 대국민 소통으로 형성된 합의에 기반해야 한다는 지적(진 전 부총리)도 없지 않았다.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원로들의 조언은 쓴소리보다 격려에 가까웠다. 현 정부 경제정책 방향과 ‘코드’가 맞았기 때문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날 개회사에서 “국가 채무의 빠른 증가로 재정의 지속 가능성에 우려가 커지고 있고,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진 규제와 경제ㆍ사회 전반에 누적된 구조적 문제 등으로 성장 잠재력이 급속히 하락하고 있다”며 “생산성 제고와 체질 강화를 위한 구조개혁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건전 재정 기조 확립을 위해서도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