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분명 꽃인데 나만 그걸 몰랐던 거다. 이제 봄이다. 너도 꽃을 피워라.' 나태주 시인이 쓴 시구입니다. 자신이 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지금껏 다양한 일을 했지만 자신감을 잃은 이들이 자기 삶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의 소명인 것 같아요."
대구 수성구 늘사랑청소년센터는 학교 밖의 학교다. 위기 청소년들이 이곳에 모여 6개월 동안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면서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한다. 박미향(54) 늘사랑청소년센터 센터장은 "잘못을 한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그에 앞서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라면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찾아주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고 밝혔다.
"스스로를 잡초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에요.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나도 꽃을 피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찾게 한 후 사회로 돌려보내는 것이 제 일이죠."
박 센터장이 '자신이 꽃인줄 모르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뛰어든 것은 1998년이었다. 늘사랑청소년센터의 전신인 대한사회복지회 혜림원에 취업했다. 혜림원은 1986년 대구 경북 최초로 개원한 미혼모 시설이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혼모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부모 모르게 출산한 후 알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불어불문학 전공자로 사회복지분야와 무관했으나, 당시만 해도 교원자격증이 있으면 취업이 가능했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지금은 청소년과 함께 하고 있지만, 그때는 미혼모와 자녀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대한사회복지회 대구아동상담소에서 국내입양 일을 했다. 박 센터장은 미혼모를 돌보는 한편, 입양을 희망하는 가정을 방문해 입양 가능 여부를 조사했다. 박 센터장은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오늘은 어떤 가정을 만나게 될까 설레기도 했다"면서 "아이들의 가정을 찾아주는 일이 참 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2000년대 초반 무렵 미국에 있는 입양기관에 연수를 갔다. 두 가지 부분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첫째는 입양기관 직원들이 으레 한두 명을 자신의 가정에 입양한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장애아였다. 또 하나는 입양에서 업무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입양부모 교육을 비롯해 성인이 된 입양인들과 아직 청소년인 입양인들 사이의 만남의 장을 만들어준다는 것이었다. 형이 동생을 멘토처럼 도와주는 방식이었다.
"입양에 대한 인식 자체가 우리보다 한 발짝 더 앞서 있었던 것입니다. 건강한 입양 문화가 형성된 것이죠."
우리나라도 입양문화가 조금씩 변화해왔다. 2000년대 전만 해도 대부분 비밀입양이었다. 입양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서구처럼 공개입양이 원칙이 되었다.
박 센터장은 2006년 아이들을 데려간 후 쉬쉬하던 문화가 안타까워 공개입양 부모 모임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입양부모들은 정보가 부족했다. 먼저 입양한 선배들에게 금과옥조 같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모임은 당연히 이런저런 체험담과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졌다. 박 센터장은 가장 요긴한 정보를 10가지 정도를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오프라인에서 형성한 모임이 온라인으로 확장되더니 얼마 가지않아 전국 모임으로 발전했다. 1기 부모들과는 지금도 소통하고 있다. 1년에 한번은 전체 부모들이 모이는 시간을 가졌다. 2012년 이런 부모교육이 법제화되었다. 법보다 먼저 시행한 부모 프로그램이었던 셈이다.
2000년대 초, 미혼모들이 직접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저출산이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정치권에서 미혼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 저출산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양육미혼모를 돕기 위한 심포지엄이 활발하게 열렸다. 대한사회복지회는 2006년 대구 동구에 아파트를 하나 사서 ‘잉아터’를 열었다. 대구경북 최초의 미혼모자공동생활가정이었다.
2015년 갑작스런 변화가 찾아왔다. 한부모가족지원법이 개정되면서 "입양기관이 법인인 곳에서는 미혼모자기본시설을 운영할수 없다"는 규정이 생겼다. 해외입양을 종식시키려는 취지였다. 하는 수 없었다. 혜림원은 2015년 6월에 공식적으로 미혼모 업무를 중단했다.
대구시와 1년동안 상의한 끝에 혜림원 간판을 내리고 아동보호치료시설로 업무를 전환했다. 미혼모에서 위기 청소년으로 대상이 바뀌었지만 홀가분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간판을 바꿔 달았어도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혜림원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쳤다.
사전 조사를 철저하게 했다. 수도권에 있는 청소년센터를 방문하기도 하고 아이들을 직접 만나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아이들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짜고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렇게 2015년 9월15일에 센터를 개원했다.
"센터 문을 연 후 가정법원을 찾아갔어요. 이런 기관이 만들어졌다고 하니 소년부 판사님이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이런 기관이 꼭 필요했다면서요. 돌아오는 길에 힘이 펄펄 나더군요."
센터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아이들이 경험한 '거친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첫 번째 목표는 센터 직원들이 '믿을 만한 어른들이 되어준다'는 것이었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곁에서 있어주자는 생각이었다.
"상상도 하기 힘든 경험을 한 아이들이 많아요. 부모가 교도소에 있는 경우도 있고,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걸 직접 목격한 아이도 있어요.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친척 집을 전전하며 늘 불안하게 지내온 아이도 있었구요."
피해자였던 아이들이 나중에 가해자가 된다. 가장 싫어했던 사람을 닮아가는 것이다. 박 센터장은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말 정신없이 쫓기듯 살아온 아이들입니다. 오롯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하는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해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섯 달 동안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을 발견하도록 격려하는 것이죠."
박 센터장에 따르면 아이들은 한번 시작하면 무섭게 변한다. 그 시작은 ‘성공’의 경험이다. 생활우수상, 독서상 등 크든 작든 상을 수여하고 한자시험 자격증 같은 시험에 응시하게 해 ‘성공’을 맛보게 한다. 태어나 한번도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작은 상이지만 효과는 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격한다. 그렇게 아이들의 내면을 가득 채운 부정적인 에너지를 몰아내고 긍정적인 힘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아이들이 크든 작든 성취를 하고 나면 으레 하는 말이 있어요. '나는 뭐든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되네' 하고 깨달았다고요. 특히 검정고시를 치고 나면 하나 같이 펑펑 울어요. 그야말로 생애 처음 공부를 하고 어떤 성과를 내본 친구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작은 것이라도 성공하고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나씩 차곡 차곡 쌓게 합니다. 그렇게 사회에 나갈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그러나 아이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박 센터장은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한다"는 당부를 전했다.
"미혼모에게 그랬던 것처럼 낙인을 찍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어요. 아무리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신감이 생겨도 아이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쌀쌀한 곳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핀 꽃이 견디기 힘듭니다. 조금만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응원해주면 잘할 수 있는 아이들이에요. '꽃들에게 희망을, 아이들에게 온기를', 제가 세상을 향해 늘 주문처럼 외우는 말입니다."
늘사랑청소년센터는 2022년 전국 아동 생활시설 277개소를 대상으로 진행된 전국사회복지시설 평가에서 시설과 환경, 재정 조직 운영, 프로그램 서비스, 아동의 권리, 지역사회 연계, 시설 운영 전반 등 6개 평가 영역 39개 지표에서 모두 A등급을 받았다. 우수프로그램부분에서는 ‘참 소중한 나, 참 좋은 너. 참 행복한 공동체 프로그램’으로 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