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의 섬나라인 파푸아뉴기니가 최근 국제 질서를 좌우하는 양대 축인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의 무대가 됐다. 파푸아뉴기니를 비롯한 태평양의 도서국들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 달러 이하인 약소국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중국이 수십 년째 공을 들이면서 입김을 강화해 가자, 미국도 부랴부랴 이를 차단하기 위한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
22일(현지시간) AFP통신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은 이날 파푸아뉴기니와 새로운 방위 협정을 체결했다. 애초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조 바이든 대통령이 파푸아뉴기니를 직접 찾아 태평양 도서국 정상들을 만날 계획이었지만, 연방정부 부채한도 협상이라는 국내 문제에 발이 묶이면서 전날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대신 방문했다.
이번 방위 협정에 따라 미국으로선 파푸아뉴기니의 공항과 항구 활용은 물론, 위성 보안시스템으로 일대 해역을 감시할 길이 열리게 됐다. 그에 대한 상응 조치로 파푸아뉴기니엔 4,500만 달러(약 593억 원) 상당의 지원이 이뤄진다. 미 국무부는 “새로운 협정은 남태평양 지역의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방문이 불발되긴 했으나, 바이든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려 했던 배경에는 역시나 중국이 있다. 중국은 오랜 시간 동안 이 지역 국가들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며 대만과의 단교를 이끌어냈다. 여기에다 지난해에는 호주 코앞에 있는 솔로몬제도와 안보협정도 맺었다. 그 결과, 중국 병력과 군함의 주둔이 가능해졌고, 태평양 전역으로 군사적 영향력을 넓힐 교두보가 마련됐다. 과거 인도·태평양 지역을 ‘미국의 호수’로 부를 만큼, 자신의 세력권으로 여겼던 미국 입장에선 뼈아픈 타격이었다.
이후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남태평양 지역과의 스킨십을 부쩍 강화하고 나섰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9월 태평양도서국포럼(PIF) 회원국 정상들을 초청해 사상 첫 미국·태평양도서국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솔로몬제도에는 30년 만에 미국대사관을 다시 열었고, 통가에도 대사관을 개설했다. 키리바시, 바누아투의 대사관 설치도 예고한 상태다. 파푸아뉴기니와의 방위 협정 체결도 이 지역에서 중국을 군사적으로 붕쇄하려는 움직임이다. 블링컨 장관은 올해 말 PIF 정상들을 미국 워싱턴에 초청한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의사도 전달할 계획이라고 파푸아뉴기니 매체 포스트쿠리어는 전했다.
다만 바이든 대통령의 도착 예정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등 기대감으로 들떴던 파푸아뉴기니는 그의 방문 취소에 잔뜩 실망한 분위기다. 하로르빌 파푸아뉴기니대 교수는 미 공영라디오 NPR에 “(시진핑) 국가주석이 파푸아뉴기니를 찾고 인근 국가 지도자들과도 만난 중국과 비교하면 미국이 태평양 국가들을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8년 파푸아뉴기니 방문을 포함, 지금까지 이 지역을 세 차례나 찾았다.
실제 현지인들의 정서도 미국보다 중국 쪽에 밀착해 있는 모습이다. 대학생들은 이날 방위 협정에 대해 “주권침해일 뿐 아니라, 중국을 화나게 할 것”이라며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 학생은 AP통신에 “중국은 도로를 건설하고 학교에도 돈을 지원해 나라에 큰 도움을 줬지만, 미국은 우리를 돕지 않는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