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피폭된 한국인 원폭 피해자 14명이 18일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해 '핵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19일 개막하는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기간 중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마 후미오 일본 총리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에 함께 참배하기로 한 것과 관련, 이들은 “늦었지만 정말 기쁘다”면서도 한국과 일본, 미국 정부 모두가 원폭 피해자들에 대해 각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원술(80) 한국원폭피해자협회장과 각 지역 지부장 등 14명은 이날 히로시마 시청 기자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한목소리로 한미일 3국의 무책임을 성토하며 그간의 고통을 토로했다. 정 회장은 “원폭 후 78년이 되어 처음으로 우리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위령비에 참배하다니 감격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곧이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미국, 전쟁을 일으킨 일본, 피폭돼 귀국한 우리를 외면한 한국 모두 잘못이 있다”며 “(특히) 피폭으로 상처와 후유증을 앓고 차별 대우도 받아 살기 힘든데, 한국 정부는 우리를 방치했다”고 지적했다.
심진태 합천지부장도 한미일 3국의 책임을 조목조목 짚었다. 경남 합천은 다수의 피폭자가 모여 사는 지역으로, 심 지부장은 “과거 피폭자도 몸에서 진물이 났고 한센병 환자도 몸에서 진물이 흘러나오는 탓에 둘 다 지역에서 소외당했다”며 한국에서 차별받은 경험을 밝혔다. 이어 “한국에는 아직 위령비가 하나도 없는데 한국 정부 또는 전쟁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가 설립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는 “미국이 78년째 사과 한 번 안 했다”며 “이번에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일본에) 온 김에 참배만 하지 말고 사과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는 그러나 전날 바이든 대통령이 원폭에 대한 메시지를 발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인 이외의 피폭자 중에서 한국인이 특히 많은 건 결국 강제동원(징용)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일본 군수공장이 다수 있었고, 상당수의 한국인이 이곳에 끌려왔던 것이다. 유병문 부산지부장은 자신의 가족이 ‘원폭’ ‘징용’ ‘차별’의 3중고를 겪었다고 했다. 그의 당숙은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을 하다 가혹한 환경을 견디지 못해 도망쳤음에도 피폭을 당했다. 삼촌은 피폭으로 즉사해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본인과 다른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핍박을 받았다. 유 지부장은 “다시는 우리와 같은 불행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 매년 사진전을 열고 원폭의 참상을 알렸는데 벌써 53회째가 됐다”고 말했다.
아울러 전쟁 반대와 ‘핵무기 없는 세상’에 대한 희망도 피력했다. 정 회장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는데 절대로 핵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이 히로시마에서 핵으로 고통받은 일본·한국의 피해자들을 잘 보고 ‘핵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생각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후손들의 건강과 권익을 위한 단체로, 현재 2,000명가량의 회원이 등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