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당시 대규모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선고받은 고(故) 박기래씨가 48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18일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 군기누설 등 혐의로 기소돼 사형 선고를 받았던 박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박씨는 1968년 박정희 정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재건 활동'에 관여했다는 의혹으로 보안사령부에 체포돼 수사를 거쳐 1975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아 17년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1991년 석가탄신일 특사로 가석방됐다. 2000년 사면·복권된 박씨는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다가 2012년 별세했다.
박씨의 유족은 2018년 12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민간인을 수사할 권한이 없는 보안사령부가 영장 없이 박씨를 체포·감금해 불법수사했고, 구타와 고문 등 가혹행위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는 이유였다. 서울고법은 2020년 5월 재심을 결정했다.
검찰은 재심 개시 사건에선 이례적으로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무죄가 선고되자 대법원에 상고까지 했다. 검찰은 줄곧 "박씨의 법정 증언에 압박이 없었는데도 수사기관 진술과 같은 취지로 진술했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공판조서에 담긴 진술 내용도 조작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재심 재판부는 그러나 "피고인이 불법구금, 고문 등 가혹행위로 보안사령부에서 임의성 없는 진술을 한 뒤, 그 심리상태가 법정에서도 지속됐다"며 "법정 증언 역시 임의성 없는 자백에 해당하므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 외의 증거들도 불법 수사에 기초하고 있어 증거능력이 없거나, 공소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고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역시 재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박씨의 유족들은 선고 직후 기자들과 만나 "오늘 재판이 48년의 한을 다 풀어줬다"며 만세를 외쳤다. 장남 박창선씨는 "검찰은 반성은커녕 17년 옥고를 치르고 고문당한 분에게 다시 무기징역을 구형했는데, 너무나 이례적이고 부적절하다"면서 "처음으로 무죄가 확정됐기에 공동 피고인들도 재심을 청구해 한을 풀었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유족을 대리한 김국진 변호사는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무고한 국민이 희생돼선 안 된다는 형사소송법의 기본 원칙을 재확인한 판결"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