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만화영화’가 때아닌 수난 시대를 맞고 있다. 시대 변화에 발맞춰 다양한 성적 지향·성 정체성을 지닌 캐릭터를 등장시켰다가 거센 항의와 반발에 휘말리고 있는 것이다. 공화당의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공립학교의 관련 토론을 금지한 ‘돈 세이 게이(Don't say gay·동성애자를 입에 올리지 말라) 법’을 제정하는 등 미국 내 문화 전쟁이 갈수록 불붙는 가운데, 만화영화 같은 어린이용 콘텐츠를 보는 시선마저 엄격해지는 분위기다.
“나는 ‘나이트 셰이드’. 나의 대명사는 그들(they/them)입니다.”
한국에선 영화로 유명한 ‘트랜스포머: 어스스파크’ 만화영화 시리즈에 등장한 ‘논 바이너리’(이분법적 성별 구분에서 벗어난 정체성) 로봇의 대사다. 이 로봇이 남성(he)이나 여성(she)을 가리키는 대명사 대신, 삼인칭 복수로 자신을 불러 달라고 말하는 장면은 최근 미국에서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렀다. 보수 매체인 폭스뉴스의 유명 진행자 로라 잉그러햄은 12일(현지시간)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이 만화영화는 7세 이상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졌다”며 “말도 안 되는 대명사를 일곱 살 아이의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날 나이트 셰이드의 등장 장면이 담긴 동영상에 “그들이 당신의 아이를 뒤쫓고 있다”라는 문구를 붙인 트위터 게시물은 2,000만 회 가까이 재생되는 등 커다란 관심을 모았다. 다만 ‘정치적 올바름’ 차원이 아니더라도 “로봇은 원래 성별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이라는 표현이 맞다”는 반응도 나왔다.
플로리다주 허낸도에서는 청소년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디즈니 만화영화 ‘스트레인지 월드’를 학생들에게 보여준 교사가 ‘돈 세이 게이 법’ 위반 혐의로 주 교육당국 조사를 받게 되는 일도 발생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인 제나 바비는 자신의 반 아이들에게 이 만화를 틀어줬다. 환상의 생물이 사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내용이기에 학생들이 배우는 지구과학, 생태계와 관련이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일부 학부모는 “아이에게 신념을 강요하고 세뇌하는 것은 교사의 일이 아니다”라면서 그를 신고했다.
조사 결과에 따라 교사 면허를 잃거나 형사처벌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바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13일 틱톡에 올린 영상을 통해 성소수자 캐릭터 때문에 해당 만화를 보여준 게 아니라면서 “학생들은 조사관으로부터 한 명씩 심문을 받기 전까진 누구도 ‘동성애’에 대해 생각조차 안 했다”고 밝혔다. 이어 “오히려 이 일이 학생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친절과 긍정, 연민을 갖자고 말하려는 것”이라며 “그것이 우리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열쇠”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