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CNN방송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타운홀 미팅(town hall meeting·비공식적 공개 주민 회의)’을 주최하고 생중계했다가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대선 결과 조작 음모론, 성추행 민사소송 조작설 등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항상 늘어놓는 거짓말을 여과 없이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전달했다는 이유다. 높은 시청률만을 노리면서 정작 저널리즘의 본질은 외면한 게 아니냐는 비판인 셈이다.
11일(현지시간) 미 뉴욕타임스(NYT)는 전날 저녁 황금시간대에 뉴햄프셔주에서 열린 트럼프 전 대통령 타운홀 행사와 관련해 “트럼프와 ‘오랜 악연’인 CNN이 이를 주최해 논란에 휩싸였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일 오후 8시 미 전역에 중계된 생방송에서 “2020년 대선 결과는 조작됐다”며 종전 입장을 반복했다. 9일 본인이 패소한 성폭력 의혹 민사소송과 관련해서도 원고인 E. 진 캐럴에 대해 “난 모르는 사람” “정신 나간 추잡한 여자” 등 폄하 발언을 쏟아냈다.
문제는 이런 트럼프 전 대통령 발언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일방 주장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법원에서 인정하지 않은 거짓 주장에 가깝다. 그럼에도 방송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대선 무효’ 언급에 환호하거나, 성범죄 피해자인 캐럴을 비웃는 소리가 그대로 송출됐다.
원래 트럼프 전 대통령과 CNN은 숱한 마찰을 빚었던 앙숙 관계다. 2018년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기자회견 도중 존 아코스타 CNN 기자에게 “나가라”며 삿대질을 하고, 백악관 출입을 정지시킨 게 대표적이다. 2020년에도 CNN 기자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건강악화설을 묻자 “그건 당신(CNN)의 가짜뉴스였다. 질문 그만하라”며 말을 끊었다.
심지어 트럼프 전 대통령은 트위터 계정에 본인이 프로레슬링 경기장 밖에서 CNN 로고가 얼굴에 합성된 인물을 때려눕히는 패러디 영상을 공유한 적도 있다. CNN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이었다. 그는 지난해 CNN을 상대로 4억7,500만 달러(약 6,340억 원) 규모의 명예훼손 소송도 걸었다.
그럼에도 CNN이 트럼프 전 대통령 타운홀 행사 보도에 나선 건 ‘시청률’ 때문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소식통을 인용해 “CNN이 ‘지나치게 진보적이 됐다’는 이유로 일부 시청자가 이탈하자, 그런 이미지를 벗으려 톤(tone) 수정에 나선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해당 방송은 310만 명의 시청자를 끌어모아 흥행에 성공했다. 동시간대 케이블 TV프로그램 중 최다 시청률을 기록했고, 중계가 끝난 뒤 CNN의 오후 9~11시 프로그램도 덩달아 시청률이 올랐다.
제안도 CNN이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WSJ는 “올해 2월 CNN이 트럼프 측근에게 아이디어를 냈는데, 의외로 트럼프가 수락한 것”이라고 전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공화당 내 경쟁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를 밀어주고 있는 폭스뉴스에 화가 나 있었던 데다, 좀 더 다양한 성향의 유권자와 접촉해 당내 경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후문이다.
CNN은 공식적으론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크리스 릭트 최고경영자는 “트럼프 취재가 지저분하고 까다롭다는 걸 모두 알지만 그건 우리 업무”라는 입장을 밝혔다. CNN은 이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주장에 대한 팩트체크 뉴스를 내보냈다.
그러나 미국 주요 언론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WSJ는 “2021년 1월 6일 지지자들을 선동해 의사당을 공격하도록 한 정치인한테 거짓말을 퍼뜨릴 또 다른 플랫폼을 제공한 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CNN 내부에서도 해당 방송을 ‘재앙’이라 칭하면서 “10일 송출된 거짓말이 미국에 어떤 도움이 되나”라는 자성론이 나오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