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막바지에 기획된 것으로 알려진 '재일유학생 간첩단 사건'에서 정부의 허위 수사 결과 발표뿐 아니라 지명수배와 불법 구금도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양관수씨와 그의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1987년 9월 "장의균씨가 일본 유학생 시절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접촉해 간첩 활동을 했다"며 지령을 내린 인물로 양관수씨를 지목했다. 장씨는 이 사건으로 징역 8년을 확정받았다. 양씨는 안기부 수사 결과 발표 뒤 지명수배돼 일본에 머무르다가 1998년 귀국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양씨와 가족들은 2018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양씨에 대한 △수사 보도자료 발표 △지명수배 △불법구금 △기소유예 처분이 부당했다는 취지였다. 장씨가 2017년 12월 "불법 구금 상태에서 강압 조사를 받았다"는 이유로 재심 끝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사실도 양씨 주장을 뒷받침했다. 국가 측은 손해배상 청구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맞섰다.
하급심은 수사 보도자료 발표의 위법성은 인정하면서도, 지명수배는 문제가 없다고 봤다. "안기부의 지명수배는 피의자 소재를 찾기 위한 수사 방편에 불과하다"는 취지였다. 불법구금에 대해선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봤다. 양씨가 입국 전 '가벼운 조사'를 미리 통보받았기 때문에 과거사정리법상 소멸시효가 적용되는 '중대한 인권침해·조작의혹 사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명수배의 위법성을 인정하며 항소심 판단을 깼다. "가혹행위를 포함한 위법한 방법으로 수집된 증거에 기초해 이뤄진 지명수배는 위법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은 "불법 구금은 소멸시효가 만료됐다"는 하급심 판단도 뒤집었다. 수사 과정 전반의 중대한 인권침해가 확인됐다면 그중 일부만 떼어내 과거사정리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해선 안 된다는 취지다. "중대한 인권침해 및 조작 의혹 사건 피해자의 국가배상 청구권에는 민법상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의 2018년 결정을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