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몸집만 커진 한국… ‘더 오래 일해라’ 50년 전 얘기 다시 시작”

입력
2023.04.03 17:50
"어떻게 삶의 질 높일까" 고민할 때
'코인 투기' 안 해도 "삶 나아진다" 비전 줘야

경제학자 장하준 영국 런던대 교수가 최근 정부에서 검토 중인 근로시간 연장에 대해 ‘50년 전 얘기’라며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한국이 부유한 선진국이 됐음에도 복지제도나 삶의 질은 그에 한참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한국, 몸집만 커지고 정신은 사춘기... 정체성 위기가 가장 심각"

장 교수는 3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 “(우리나라는) 엄청나게 생산성 높이고 기술 투자해서 부자 나라가 됐는데 갑자기 또 난데없이 ‘일을 더 해야 된다, 더 오래 해야 된다, 최저임금 같은 거는 안 올려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한 50년 전에 할 얘기를 다시 또 시작을 하고 있다”며 “어떻게 해서 사람들을 질 좋은 삶을 살게 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해서 기술 개발하고 최고급으로 경쟁을 해야 되는데, 왜 지금 이 정체성에 혼란이 와가지고 갑자기 옛날에 하던 걸로 돌아갔다”고 우려했다. 주 최대 69시간까지 근무가 가능하도록 한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을 꼬집은 것이다.

장 교수는 세계 경제침체에 따른 국내 경제의 위기보다 이 같은 장기적인 정체성 위기가 더욱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한 장기적인 정체성 위기가 저는 더 큰 문제라고 본다”며 “지금 세계금융위기 이런 거 나면 우리 혼자 무슨 변수 있나. 최대한 어떻게 막고 버텨야 되는데 이거(정체성)는 우리가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지적하는 정체성 위기는 나라의 경제력보다 턱없이 낮은 국민들의 삶의 질을 뜻한다. 장 교수는 “나라가 경제 발전을 잘해서 몸집은 컸는데 이 정신이 아직 그 몸집에 못 따라오는 사춘기 아이들 같은 나라가 돼버렸다”며 “예를 들어 선진국들 중에는 복지국가(제도)가 제일 작은 나라”라고 말했다. 이어 “옛날에는 복지국가가 작아도 경제가 고속 성장을 하니까 일자리도 많이 생기고, 대가족 제도가 남아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고성장도 끝났고 대가족 제도는 다 해체됐다”며 “그러면 당연히 거기에 맞춰서 복지국가를 늘려가지고 전 국민이 가족이 돼야 되는데 그걸 안 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꾸 문제가 생겨서 출생률도 세계 최하 1위에다가 사회 갈등도 자꾸 높아진다”고 진단했다.


"투기하는 젊은 층 마음 이해돼... '생활 나아진다'는 비전 줘야"

이처럼 불평등이 높아지고 계층 상승의 여지가 줄어들면서 젊은 세대들이 코인, 주식 투자를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코인 투자에 대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투자는 펀더멘털(Fundamental·나라 경제 상태를 나타내는 주요한 경제 지표)을 이해하고 하는 건데, 펀더멘털로 보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수익을 바라고 돈을 넣으면 그거는 투기”라며 “(코인 투자는) 투기와 사기 중간쯤 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느 나라나 (코인 투자)하는 층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처럼 대다수가 거기에 관심 있고, 라디오에서 그런 거 어떻게 하라고 코치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나라는 없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도 장 교수는 “(코인을 하는 젊은이들이)이해가 간다”며 “그게 아니면 어떻게 자기 삶을 개선시키겠나. 미래가 안 보이니까 그거밖에 할 게 없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 역시 복지제도라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투자에) 성공한 사람이 한 명이면 실패한 사람은 다섯 명"이라며 "그런데 다섯 명이 실패를 해도 적당히 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망하는 거니까 이게 큰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이런 거를 없애주려면 복지제도도 잘 만들고 직업 훈련이라든가 그런 고용 구조라든가 이런 것도 바꿔가지고 '이런 투기 안 해도 뭔가 자기 생활이 개선될 수 있다' 그런 비전을 심어줘야지 안 그러면은 계속 이거밖에 할 게 없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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