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게릴라 섬멸', '평정'과 함께 죽음의 폐허가 된 제주도는 인간의 기억마저 허공 속 바람으로 사라지고 땅속 깊이 바닷속 깊이 묻혀, 섬은 영구동토가 되었고 '4·3 사건'은 기억과 함께 지상에서 사라졌다."(김석범의 '바다 밑에서' 일부)
제주 4·3이 올해로 75주년이 됐다. 제주도민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나 50년 가까이 사라지다시피 했던 참혹한 역사. 진상 규명을 위한 ‘4·3특별법'이 2000년 제정됐으나 아직 정확한 이름조차 없다. 아무런 글씨가 없는 '백비'로 세워진 제주4·3평화기념관 비석에 이름을 새겨넣는 날이 언제일까. 그날을 조금이나마 앞당기는 데 보탬이 될 책들이 출간됐다. 문학부터 미술, 정치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4·3의 진실로 한 걸음 다가가려는 노력들이 담겼다.
대표 신간은 자이니치(在日·재일 한국인) 작가 김석범의 장편소설 '바다 밑에서'다. 4·3을 다룬 유일한 대하소설 '화산도'(1997)를 이어받아 쓴 작품이다. '화산도'는 2015년 한국어 완역본이 나온 후 이호철통일로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화산도'가 4·3 현장과 친일파 처단 문제를 다뤘다면 '바다 밑에서'는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돼 일본으로 도망한 인물 '남승지'를 중심으로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전한다. "살육의 조국에서 도망쳐 적국에 목숨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시간에는 학살의 상흔, 디아스포라의 혼란 등이 뒤섞여 있다. 아흔여덟의 작가가 '모든 죽은 자는 산 자를 위해 있고 죽은 자는 산 자 속에 살아 있다'는 생각으로 쓰고 또 써 완성시킨 4·3의 이야기다.
보리를 사용한 보리아트로 4·3을 기록한 독특한 작품집도 있다. 신간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에는 보리아트 명인 이수진 작가가 4·3 이후 폐허가 된 마을터에서 자란 보리줄기를 주소재로 삼고 현장에서 수집한 풀, 나무, 흙 등을 사용한 작품 50여 점이 수록돼 있다. 사건의 발단부터 현재까지를 순차적으로 담은 작품에 짧은 이야기를 곁들였다. 제주 출신 박진우 제주 4·3활동가와 이하진 작가가 글을 맡았다. 보리는 제주, 그리고 4·3과 연이 깊은 소재다. 보리는 오랜 세월 제주도민의 주식이었고, 많은 보리밭은 안타깝게도 4·3 당시 학살터가 되기도 했다.
2018년부터 꾸준히 4·3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전시한 이수진 작가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리얼리즘적인 작품보다는 보는 분들이 편하게 다가와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뒀다"면서 "이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역사적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었다"고 작품 활동 계기를 설명했다.
세계사라는 큰 틀에서 4·3의 위치를 조명한 책도 발간됐다. 신간 '4·3, 19470301-19540921 기나긴 침묵 밖으로'는 1947년 제주도 관덕정광장에서 38발의 총성으로 민심이 폭발하고 혼돈이 시작된 시점부터 정부의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1954년까지 2,762일의 기록이다. 제주 출신인 저자 허호준은 한겨레신문 기자로 4·3을 오래 취재해 오다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책 집필을 위해 현장을 다니고 증언을 모았다.
특히 냉전 시기 남한이 반공의 전초기지가 되면서 제주가 희생된 과정을 중심으로 사건을 엮었다. 이현화 혜화1117 출판사 대표는 "역사 속에서 4·3이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를 다루고자 했다"면서 "제주 지역사도 한국 근현대사도 아닌, 세계 냉전체제 산물로 더 큰 틀에서 벌어진 일임을 알리고 싶었다"고 발행 취지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