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SVB 본점에선 '차분한 뱅크런'... "주말 새 폭풍이 스쳐갔다"

입력
2023.03.1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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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B 거래 정지 해제된 13일 월요일
본점·지점 앞엔 아침부터 긴 대기열


"정말 좋은 은행이었어요. 그날 전까지는."

13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의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점 앞. 긴 줄 가운데에서 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임원을 만났다. 그는 기업용 데이터 관리 솔루션을 만드는 스타트업 플래티나 시스템스(Platina Systems)의 메이치 라이 재무·운영 담당 부사장.

라이 부사장은 SVB를 "훌륭한 은행"으로 기억했다. 그는 "SVB는 어느 곳보다 스타트업을 잘 이해하는 은행"이라며 "팬데믹 시작 이후엔 각종 온라인 미팅을 열어 우리를 잠재적 투자자와 연결하고 스타트업 생태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해 줬다"고 했다.

은행 본점 앞에 길게 늘어선 줄

2014년 회사 설립 후 10년 가까이 거래한 SVB의 몰락은, 라이 부사장에겐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SVB는 우리가 거래 중인 유일한 은행은 아니지만, 직원 급여로 쓸 돈이 여기에 들어 있다"고 했다. 그나마 현금이 분산돼 있었던 덕에 회삿돈 전체가 묶일 위험은 없었지만, SVB 계좌의 돈을 꺼내지 못하면 당장 15일 급여 지급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3일(월요일) 새벽 라이 부사장은 기상하자마자 SVB 예금 전액을 다른 은행으로 이체하기 위해 온라인뱅킹을 시도했다. 그러나 "로그인 후 이체를 실행하려고 하면 다시 로그인으로 돌아가는 무한 루프에 빠졌다"고 그는 말했다. 계속 시도해 봤자 시간만 지체될 뿐이란 생각에 라이 부사장은 즉시 회사에서 서류들을 챙겨 SVB 본점으로 향했다.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30분쯤. 이미 앞엔 40여 명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과거 금융위기 때처럼 예금주들이 저마다 돈을 찾아가려고 아우성을 치는 '아비규환의 뱅크런'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라이 부사장은 "정부가 어제 예금 전액 보호를 약속했기 때문에 걱정은 없다"면서 여유를 보였지만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예상치 못한 회오리바람이 지나가고 있다"고 말해 주말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음을 암시했다.

거래 정지가 해제된 이날 SVB 본점과 각 지점 앞에는 아침부터 긴 줄이 이어졌다. 12일 연방정부와 예금보호 당국의 '예금 전액 보호'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악몽 같은 주말을 보냈던 이들이 날이 밝자마자 예금을 빼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혼잡을 예상한 SVB 측은 본점 앞에 5명의 보안요원을 배치했다. 한 요원은 "오전 9시 30분에 도착한 사람이 12시 30분쯤 들어간 것 같다"며 "창구가 두 개뿐이라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재촉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장시간 대기를 각오했다는 듯, 개중엔 아예 야외용 의자를 펴고 앉은 사람도 있었다.


안도했지만, 인터뷰 극구 사양한 이유는?

기다리기만 하면 돈을 찾을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다들 표정은 밝았지만, 이들 가운데 이름과 소속을 밝히고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라이 부사장이 유일했다. 익명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에도 대부분 손사래만 쳤고, 설득 끝에 겨우 인터뷰를 마쳤으나 "회사에서 절대 기사가 나가면 안 된다고 하니, 모든 기록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한 한국인 스타트업 임원 역시 수차례 요청에도 극구 인터뷰를 사양했다. "외부에 리스크를 노출하는 게 조심스럽다"고 그는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서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 업체의 경우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이용자들이 계속 이용하길 꺼려 할 것"이라며 "괜히 '저 회사도 물렸대'라는 소문이라도 날까 봐 주말 내내 정말 조심스럽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11, 12일 이틀간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은 긴급 자금 마련을 위해 발 벗고 뛰는 한편, 정부의 구제 조치를 끌어내기 위한 목소리를 모으는 데 여념이 없었다. SVB에 넣어둔 돈이 각자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 돈인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이 무너질 때 사라지게 될 일자리는 몇 개인지 등을 상세히 적은 청원서를 준비 중이었다. 또 한편에선 '어떤 은행이라도 SVB를 사주기만 하면 반드시 그 은행을 이용하겠다'는 약속을 담은 청원서도 돌았다고 한다.

다행히 청원서가 정부에 전달되기 전 예금 보호 결정이 나오며 숨통이 트였지만, 실리콘밸리 밖에선 당국의 조치를 두고 "부자 구하기"라는 비판이 나오는 중이다. 이에 대해 실리콘밸리의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가슴 아픈 일"이라며 "우리 대부분은 부자가 아니라 스타트업에 모든 걸 건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누구도 은행이 망할 거란 생각은 하기 어렵지 않지 않나. 우리도 피해자란 걸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그는 덧붙였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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