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4'에서 배우 고아라(나정 역)가 직접 불러 화제가 됐던 '시작'. 이 노래는 90년대 말 수많은 여학생들의 노래방 애창곡으로 꼽힐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청량한 음색에 풋풋한 매력을 자랑했던 가수 박기영은 어느덧 데뷔 25주년을 맞았다. 1998년 데뷔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던 그는 여전히 건재하다.
지난달 20일엔 새 디지털 싱글 ‘꽃잎’을 발매했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회상하며, 시간이 지나 홀로 남은 자신의 모습을 가슴 아프고 애절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린 곡이다. '꽃잎' 뮤직비디오에도 직접 출연한 박기영은 섬세한 연기를 선보여 관심을 모았다.
최근 서울 영등포구 KBS 신관에서 본지와 단독으로 만난 박기영은 '데뷔 25주년 소감'을 묻자, "길게 봤을 때는 아주 큰 공백기는 없었다. 꾸준히 활동하는 현역 가수란 점에 굉장히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그만큼 저를 찾아준다는 것에 감사드린다. 운이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사실 그에겐 경력이 끊길만한 상황들도 꽤 있었다. 소속사 분쟁으로 20대에 몇년 간 공백기가 있었고, 30대엔 임신과 결혼·출산·육아로 인해 활동이 쉽지 않았다. 박기영은 "우리 아이는 엄마가 직접 수유를 안 하면 안되는 아이였다. 예민함이 나를 닮았다. 그러다 보니 오롯이 내가 키웠다. 아이를 업고 안고 공연을 다니고 했다"며 "시드니 공연에 갈 땐 비행기 안에서 계속 울어 한숨도 못 잔 적도 있다. 옆자리 외국 남자분에게 정말 미안했다"고 회상했다.
"싱어송라이터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아이를 재우고 베란다에서 울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가장 힘든 일은 사람을 키워내는 일 같아요. 어려우면서도 귀한 일이죠.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명이라 생각해요. 제가 부귀영화나 명예를 좀 더 얻겠다고 아이를 방치했다면 지금처럼 잘 크지 못했을 거 같아요. 공백기는 필요한 시간이었고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무리 잘 되더라도 자식과의 관계가 바로 서있지 못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다행히 박기영의 딸은 밝고 건강하게 잘 자랐다. 지금은 사회성이 좋고 잘 웃고 잘 떠드는 10대 소녀다. 반면 '엄마' 박기영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무대에서 에너지를 쏟으니까, 음악하는 사람들은 거의 내성적이죠. 혼자 고민하고 가사 쓰고 곡 쓰는 작업을 해야 하니까요. 20대 때는 취향이나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서 휩쓸려 다니기도 했는데 힘들더라고요. 30대가 되면서는 조용히 지냈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자연스레 관계가 좁아지기도 했고요."
박기영은 뮤지션이 '외로움을 잘 견딜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창작에도 도움이 된단다. 당연히 힘든 시간도 있었다. 20대에 큰 공백기를 겪은 이후 무대 공포증이 생겼다. 녹음 작업하는 과정은 편안한데 무대는 너무 떨리고 힘들어 가수가 아닌 작업자로 전향할 고민도 했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가수라는 직업은 그에게 천직이었다. 어릴 때부터 취미이자 특기였던 노래가 업이 됐고, 고된 순간들도 종종 있지만 지금은 모든 게 감사하다고 했다. "이제는 다 뛰어넘은 거죠. 어떤 드라마에서 본 대사가 기억나요. '한이든 슬픔이든 즐거움이든 재주로 풀어내는 것이 예인의 삶이다'라는 대사였어요. 어떨 때는 다른 일을 하고 싶은데 할 게 없어서 (가수를) 해야 할 수밖에 없던 때도 있었어요. 지금은 최백호 선생님이 롤모델이에요. 꾸준히 오래 활동하고 싶어요."
중견가수가 된 박기영은 자신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후배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올 가을 베스트앨범도 준비하고 있다. "25년 전 불렀던 파일을 들으면서 비슷하게 불러봤는데, 딸이 '엄마 느끼해. 그냥 하던대로 해' 하더라고요. 하하. '20세기 소녀'라는 영화가 있는데, 거기에 '시작'이 나와요. 너무 감사했어요. 김유정씨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눈물 흘리면서 봤거든요. 10년 전 '응답하라 1994'에 나왔을 때도 감사했는데 저한텐 효녀 같은 곡이죠."
박기영은 내년 여름쯤 단독 콘서트도 생각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와 큰 홀에서 공연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변함없이 폭발적인 가창력과 에너지로 무대를 누비는 그는 "나이가 들어서 좋은 게 많다. 생각의 품이 넓어진다"면서 웃었다.
"가장 달라진 건 제 마음과 같은 사람이 없단 걸 받아들이는 게 마음 아프지 않다는 거죠. 예전엔 좀 더 감정의 곡선이 비탈길 같이 와다갔다 했다면 지금은 감정의 마지노선을 높이 설정해서 여유가 생겼어요. 전엔 열정과 더불어 조급함이나 성급함이 있었다면, 지금은 좀 떨어져서 조심스럽게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고요. 아이를 키우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누굴 미워하는 게 내 마음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유연한 사고를 갖고 심적으로 좀 더 편해진 것 같아서 좋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