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자국 내 반도체 투자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심사기준을 공개한 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2일 "미국과 긴밀히 협의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내놓았다. 이번 발표가 한국뿐 아니라 미국 반도체 기업에도 적용돼 문제를 삼기 쉽지 않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정부와 기업이 중국과의 반도체 거래를 제한한 반도체 보조금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에 집착하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말이 나온다. 기업들은 이제라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 상무부가 발표한 반도체 지원 심사기준에 따르면, 보조금을 신청하는 기업은 재무 건전성을 검증할 수익성 지표와 예상 현금흐름 전망치 등을 내야 한다. 또 보조금 1억5,000만 달러 이상을 받는 기업의 수익이 전망치를 초과하면 미국 정부와 초과분 일부를 공유해야 하는 내용 등도 담겨 있다.
업계 안팎에서 무리한 조건이라는 평가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①강제 조건이 아니라 보조금 신청 기업만 적용을 받는다며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다. 상무부 발표 하루 전인 지난달 27일 장영진 산업부 1차관은 "미국 수요보다 중국 수요가 많은 기업은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개별 기업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전체적인 방향이 우리 기업에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취지에서 대미 협의를 했고 앞으로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②이번 기준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기업에 적용된다는 점도 우리 정부를 망설이게 만든다. 반도체 투자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사내 어린이집을 짓고, 보조금으로 자사주 매입을 못 하는 건 우리뿐 아니라 일본, 대만, 미국 기업에도 해당된다. 이런 조건이 특정 국가에 더 불리하게 적용되지도 않는다는 게 '정부 등판'을 어렵게 만든다는 말이다.
정부는 미국이 추가로 발표할 반도체 지원법 가드레일 조항을 협상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8월 반도체 지원법을 발표하면서 이 법으로 보조금을 지원받는 기업은 앞으로 10년 동안 우려대상국(중국)에서 반도체 제조능력 확장과 관련된 거래를 제한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는데 세부 사항은 나중에 발표할 예정이다. 이 조항은 중국에 대규모 반도체 시설이 없거나 제한적으로 있는 일본, 대만에 비교해 우리 기업에 차별적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지난달 중순 장영진 차관이 미 상무부 인사들과 접촉해 우리 기업 입장을 전한 내용도 이 조항에 집중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 관계자는 "가드레일 세부 규정 마련 과정에서 우리 기업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다각도로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가 이 가드레일에 집착하는 동안 보조금 심사 조건에 갖가지 독소조항이 덧붙여지며 보조금 받는 게 손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 차원에서 미 상무부에 대응하기엔 한계가 크다고 지적한다. 결국 정부와 기업이 세부 지침을 두고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 내에서도 지급 조건에 대해 너무 까다롭다는 여론도 있는 만큼 지침의 수준이 조율될 여지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도 "이 법안의 요구 사항이 결국 반도체 기업의 부담을 늘리면서 프로젝트를 지연시킬 것"이라며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대만 TSMC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고 결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조언도 나온다. TSMC의 경우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400억 달러(약 52조6,000억 원)를 들여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는 중이다. 삼성전자 대비 투자 규모가 두 배 이상이다. 대만 언론 역시 이번 미국의 조치에 민감하다. 대만 경제일보는 이날 "반도체기업들의 미국 내 공장 투자 속도가 늦춰질 수도 있다"며 "바이든 정부에서 제시한 이익 공유 조건으로 많은 기업들이 속 쓰린 상태에 놓였다"고 보도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기업이 미 상무부와 직접 말하기 부담스러우니 정부가 나서서 의견을 조율해 줄 필요가 있다"며 "특히 정보 공개를 최소화하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도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김봉만 전경련 국제본부장은 "예외 조항을 많이 두는 미국의 통상·산업 정책 전례를 보면 이번에도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이라며 "우리 기업 의견을 물어 타협 가능성이 있는 부분을 파악하고 대응 방법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