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사고와 해양대 졸업 후 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누비고 싶어했던 승선근무 예비역 청년은 자신이 탔던 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8년 3월 16일, 사우디아라비아 해상을 지나가던 화학물질운반선에서 3등 기관사 고(故) 구민회(25)씨는 ‘힘들다’ ‘엄마 미안해, 행복했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유서 뒷장에는 자신을 괴롭혔던 동료 선원에 대한 원망을 한 자 한 자 눌러 적었다. 함께 배를 탔던 2기사는 구씨에게 폭언과 욕설뿐 아니라 선상근무수칙(SMS 매뉴얼)을 수기로 20장씩 베껴 써오게 하고 보일러 관련 작업을 매일 시키며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승선근무 예비역은 산업기능요원과 같은 대체복무의 일종이다. 졸업과 함께 3급 해기사 자격증을 얻는 해양·수산계열 학교 졸업생들은 민간 해운·수산업체 선박에 3년간 승선근무하면서 군 복무를 대체한다. 이들은 한 번 배를 타고 나가면 망망대해에서 반 년 이상 생활해야 한다. 하지만 고립된 선박에서 인권침해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고 피해를 당해도 신고할 데가 마땅치 않아 인권 사각지대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 구씨의 안타까운 죽음과 관련해 “승선근무 예비역의 취약한 근무환경을 고려하면, 구씨의 죽음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직무상 사망”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16일 한국일보 취재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1부(부장 전지원)는 구씨 유족이 가해자와 선박회사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사측의 직무상 책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사망 △선장 등 현장 책임자의 관리 부실을 인정하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1심은 구씨의 사망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것이라는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2심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승선근무 예비역의 특수한 근무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배에서 내려 근무기간이 부족하게 되면 군복무를 해야 할 지위에 있어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쉽사리 이를 문제 삼거나 하선을 결심하기 어려웠다”며 “피고의 행위가 불법성이 높지 않더라도, 환경적 요인 때문에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법원은 선장에게도 무거운 책임을 지웠다. 재판부는 “망인이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은 선내 고충처리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라면서 “이를 유지할 책임은 선장에게 있다”고 밝혔다. 선박회사와 계약한 일본 선주사 이이노마린서비스에도 사용자 책임이 있다며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승선근무 예비역들은 고립된 배에서 벌어지는 괴롭힘이 지금도 만연하다고 입을 모은다. 도망칠 수 있는 곳이 망망대해밖에 없는 데다, 폐쇄적인 해운업계의 문화까지 겹쳐 피해를 공론화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승선근무 예비역은 “배에서 3년을 보내야 병역 의무를 마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가해자와 선박회사에서 '육지 대기'를 무기로 입막음을 시도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처럼 인권 침해가 빈발하다 보니 승선근무 예비역을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 병무청이 집계한 ‘최근 5년 산업지원인력 편입취소자 현황’에 따르면, 승선근무 예비역 편입취소는 2018년 70명 → 2021년 174명 → 2022년 상반기 207명으로 증가하고 있다.
해운업계는 인력 부족을 이유로 승선근무 예비역이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 제도가 폐지되면 해운업과 연관 산업을 지탱하는 해기사 수급이 단절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업계와 정부가 마련한 근무 환경 개선 대책은 △연 2회 모바일 인권침해 여부 전수조사 △선원 근로감독관에게 조사 의뢰 △긴급구제 필요 시 해운업체 공조 등으로 미미한 수준이다.
직장갑질 119 소속 정소연 변호사(법률사무소 보다)는 “배 위에 고립돼있고, 쉽게 그만 둘 수 없는 승선근무 예비역의 처지가 적극 고려돼야 한다”며 “정부와 회사가 심각성을 인식하고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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