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사라졌다. 일터인 시계방에서 평생 시계 수리에만 매진하던 분이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던 어느 날, 차 운전석에 앉은 날 바라보고 서 있는 아버지를 봤다. 차 문을 열고 나갔지만 아버지는 없다. 그때 떠오른 건 학창 시절 아버지가 털어놓았던 시간여행 경험담. 술 취해서 한 헛소리라 생각했는데, 사실인 걸까.
김희선(51) 작가의 신간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보수적 시간관을 깨트리며 독자를 끌어당긴다. 소설집에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써내려 간 단편 8편이 실렸다. 모두 "찰나이면서 동시에 영원이었고 생의 역사이자 우주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우르는 시간"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다. 첫 수록작 '공간 서점'은 시간여행자인 아버지의 비밀을 풀어가는 여정으로, 김희선 문학세계의 관문과 같다.
소설집은 시계태엽처럼 정교하다. 여러 개의 시간관이 밀접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인물들의 서사가 얽힌다. 연작 소설은 아니지만 각 소설들이 맞닿은 지점을 만날 때면 보물찾기를 한 듯 반갑다. 예컨대 두 번째 장편 소설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2021)와 수록작 '공간 서점' '가깝게 우리는'의 기묘한 연결성은 공통분모인 배경 도시 'W시'에서 비롯한다. 색다른 진실을 품은 이 가상 도시는 작품의 환상적 요소를 더한다.
김희선 문학의 매력은 환상성과 현실의 절묘한 조화다. 2011년 등단한 작가는 전통적 문학성을 대변하는 이상문학상, 젊은작가상 본상에 이름 올리면서도 SF적 상상력을 거침없이 발휘해왔다. "상상과 현실의 씨실과 날실을 아주 솜씨 좋게 엮어내는 최고의 장인"이라는 정보라 작가의 격찬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신간도 첫 작품인 '공간 서점'부터 작가의 색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버지가 가족을 두고 귀환을 장담할 수 없는 시간여행을 떠난 이유는 시대적 죄책감과 연결된다. "매운 연기가 코를 찌르던" 날 오후 시계방 바로 앞에서 "어디서 날아온 건지도 모르는 총탄에 맞아" 쓰러진 학생 손님이 "다스베이더 같은 헬멧을 한 이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보고 무엇도 하지 못했던 과거가 아버지를 붙잡았다. 구체적 상황 설명이 없어도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노동권, 감염병, 핵, 노인 소외... 등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은 서사의 고리가 된다. '자동인형'을 소재로 한 단편 '가깝게 우리는'은 1970년대 여직공들을 조명한다. "전파에 세뇌당한" 여직공들이 야근 수당을 요구하고 도시락을 먹을 땐 의자에 앉아서 먹겠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자, 정부 요원들은 그들 대신 밤새 미싱을 돌릴 존재를 찾아 나선다. 우편배달부가 무한 복제되는 세상을 그린 '끝없는 우편배달부'에는 배달노동자의 과로사 문제가 투영돼 있다.
작가는 20년간 병원에서 약사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다. 생사의 갈림길인 의료 현장 최전선에서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단편이 바로 '달을 멈추다'이다. 여러 이유로 생존이 어려워진 세상에서 뇌 정보를 컴퓨터 저장장치로 옮기는 '마인드 업로딩'으로 영생을 꿈꾸는 인물들을 그려냈다. 이 세상이 냉전시대 핵전쟁으로 인류가 망한 후 마인드 업로딩된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꿈속이라는 발상을 담은 수록작 '꿈의 귀환'도 비슷한 맥락이다. 죽음과 영생, 현실과 꿈 그 두 세계를 오가는 서사를 통해 작가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물론 이처럼 시공간이 뒤죽박죽 흘러도 궁극적으로 작가의 메시지는 한곳을 향한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이의 꿈에 불과하다면, 거기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계속하여 삶을 영위해 나갈 이유를 내포합니다. 꿈이든, 생시든, 무언가가 존재할 확률은 언제나 제로에 가깝고, 우린 그 엄청나게 작은 확률을 딛고 여기 이렇게 서 있으니까요." ('꿈의 귀환' 중)